[경술국치 100년] 꽃다운 청춘 바친 일제 근로정신대 할머니들… 66년 전 그 현장서 또 울었다

입력 2010-03-23 22:47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2부 낯선 기업, 숨은 가해자

① 근로정신대 징용의 주범 후지코시


할머니 두 명은 우비 차림이었다. 공장 문 앞에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사장 도둑놈 ×× 나와라.” 여든 살 안팎의 두 할머니는 어디서 힘이 났는지 문 앞을 지킨 경비원 몇 사람을 순식간에 밀쳐냈다. 마지막 경비원을 제치고 나니 철문과 맞닥뜨렸다.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자 땅바닥에 주저앉아 큰 소리로 울었다. “우리를 왜 막아. 사장 불러와. 사죄하란 말이다.”

지난 9일 일본 도야마(富山)현 도야마시 ㈜후지코시 공장 남문 앞에는 눈과 비가 번갈아가며 내렸다.

두 사람은 일제 강점기인 1944∼45년 후지코시 군수공장으로 강제동원됐던 김정주(79) 안금옥(가명·80) 할머니다. 10대 소녀 시절 조선여자근로정신대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었던 두 사람은 화가 복받친 상태였다. 전날 항소심 재판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했다. 이들만 울분이 가득 찬 건 아니었다.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함께 일본에 온 다른 할머니 3명과 유족인 할아버지 1명도 분을 이기지 못했다. 소송을 지원해온 일본 시민단체 사람들도 격앙돼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한국 국민 개인의 청구권은 상실됐습니다.”

와타나베 노부아키 재판장은 표정 없는 얼굴로 판결문을 읽었다. 후지코시 공장에서 자동차로 약 1시간 걸리는 나고야 고등재판소 가나자와 지부의 항소심 재판부는 원고 23명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기각했다. 2007년 9월 1심과 같은 이유로 또 졌다.

법정은 곧 소란스러워졌다. 원고들을 대표해 재판에 참석한 할머니 할아버지 6명은 퇴장하는 판사를 향해 “재판 똑바로 하라”고 항의했다. 후지코시 측 변호사의 바지를 잡고 한동안 놓지 않은 할머니도 있었다. 이들은 법정을 나와 재판소 정문 앞에 진을 쳤다. 현수막을 걸고 길바닥에 앉았는데 경찰관 수십명이 나타났다.

경찰관들은 할머니들을 번쩍 들어 정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 할머니들과 동행한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 송경섭 간사는 “소송을 시작한 2003년부터 법원 앞에서 여러 차례 집회를 열었지만 경찰이 제지한 것은 처음”이라고 전했다.

할머니들은 앞서 후지코시 공장 정문 앞에서 추도식을 치렀다. 소송 원고 23명 가운데 먼저 세상을 떠난 4명을 추모하는 행사였다. 우비를 입었지만 이날따라 연이어 쏟아지는 눈과 비에 할머니들의 옷과 신발은 흠뻑 젖었다. 어린 소녀 시절, 고통의 나날을 보내며 눈물에 젖은 것처럼.

66년 전. 어린 소녀들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열둘, 열셋, 열넷, 열다섯 살…, 꽃다운 나이였다. 일제는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의 호기심을 이용했다. 일본인 교사들은 공부를 시켜준다고, 새로운 문물을 보여준다고 어린 여학생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4년 8월 여자정신대근무령이 공포되면서 공식화됐지만 일제는 그 전부터 여성들을 모집했다. 소녀들이 도착한 곳은 도야마의 후지코시 군수공장.

“(국민학교) 6학년 때 졸업도 못 마치고, 거기 2년만 있다 오면 고등학교 졸업장 준다고 아주 그냥 말도 못하게 꼬셔가지고. 한 반 사람들이 3분에 1만 안 하고 다 움직였지.”(박임순·78·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구술자료집)

이렇게 온갖 거짓말에 속아 이곳 공장으로 간 10대 소녀는 1000명이 넘는다. 1953년 발간된 ‘후지코시 25년사’를 보면 1945년 5월 말 조선여자근로정신대로 일했던 공원(工員)은 1089명이다.

소녀들은 공장에서 쇠를 깎았다. 육중한 선반 앞에서 비행기에 들어갈 베어링을 만들었다. 후지코시는 대표적 군수업체였다. 아침 5시에 일어나 하루 10시간씩 중노동을 했다. 그럼에도 월급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안금옥 할머니는 “기계에 고인 기름을 입으로 빨아들여 빼내는 작업을 하면서 기름을 하도 많이 마셔서 아직도 위가 좋지 않다”고 증언했다.

1944년 10월 30일자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소녀들은 매일 오전 6시50분 기숙사에서 공장까지 줄을 지어 행진했다. 걸으면서 ‘반도정신처녀대의 노래’를 합창했다. 소녀들은 높은 벽과 철조망에 둘러싸여 살았다. 현지 취재를 위해 도야마를 방문한 지난 1월, 옛 기숙사와 공장은 남아 있지 않았다. 북문 쪽 빨간 벽돌담만 옛 모습 그대로다.

소녀들은 육신이 낙엽처럼 사그라지는 듯한 배고픔에 시달렸다. 후지코시는 죽지 않을 만큼만 밥을 줬다. 점심에는 밥 대신 손바닥 반 크기의 빵이 나왔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미군 폭격기가 폭탄을 떨어뜨릴 때도 먹을 것을 찾아 헤맸다. “얼마나 배가 고프면… 토마토를 따서 이렇게 먹으면서 가다가 또 (폭격이) 펑∼하면서 보면 천지가 다 (환하게) 비치는 거여.”(권석순·80·구술자료집)

김정주 할머니가 끌려간 사연은 기구하다. 언니 김성주(81)씨는 1944년 5월 근로정신대로 동원돼 나고야 미쓰비시중공업에서 노역을 했다. 김 할머니는 일본 가면 언니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일본인 교사의 말에 속아 연락선을 탔다. 전남 순천남국민학교 6학년 때인 1945년 2월이었다. 언니는 구술자료집에서 “내가 1년밖에 안됐는데 얘(동생)가 왔단 말이여. 또 일본을. 하∼도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서…”라고 했다.

삶은 어쩌면 후지코시 그 이후가 더 힘들었다. 정신대로 일본에 다녀왔다고 하면 사람들은 일본 군인에게 몸을 버리고 왔다고 생각했다. 결혼 생활이 순탄했던 사람이 별로 없다.

김 할머니는 인터뷰에서 “그놈들은 우리 고생시키고 잊어버렸는가 모르지만 나는 하나도 안 잊어버렸다”며 “월급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옛날 가치로 주는 것은 말도 안 되고 일한 대가를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할머니들은 “시간과도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시간마저 전범기업 편을 드는 지금, 대부분 80세가 넘은 할머니들 앞으로 한(恨)투성이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특별기획팀=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