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 ‘억지’… 현대사 괴리 심각

입력 2010-03-23 23:04

한·일 간 역사인식을 좁히기 위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제2기 공식 활동이 23일 최종 결과보고서 발표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2002년 3월부터 2005년 5월까지 가동됐던 1기 연구위는 한·일 양국 간 역사 인식차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그쳤지만, 2007년 6월부터 2년6개월 동안 진행된 2기 연구위는 고대사 일부에서 의견 일치를 이뤄내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독도영유권 문제, 군대위안부 등 민감한 부분은 논의조차 되지 못하는 한계도 드러냈다.

2기 연구위 성과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하는 핵심 논리인 ‘임나(任那)일본부설’이 허구라는 데 양국 학자들이 의견 일치를 본 것이다. 또한 14∼15세기 한반도 해안에 출몰했던 왜구의 주요 구성원이 일본인이었다는 데 의견 일치를 이뤘다. 일본의 일부 교과서에는 왜구의 주요 구성원으로 조선인이 포함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일본의 벼농사와 금속문화가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사실도 상당부분에서 의견을 같이했다. 특히 양국이 첨예한 대립을 보이는 교과서에 대해 집중 논의하는 ‘교과서 위원회’를 설치한 부분도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의견이 일치된 부분을 양국 교과서에 반영토록 강제하지 못하는 등 실효성 부재는 연구위 활동의 한계다. 공동위원장을 맡은 조광 고려대 교수는 “교과서 집필자들의 양심에 맡겨야 한다”고 설명했다. 당초 한국 측은 연구 결과를 교과서에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일본 측 반대로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교과서 부분에 대한 공동 권고문 역시 만들지 못했다.

민감한 현안은 건너뛰어 변죽만 울렸다는 비판도 있다. 연구위는 2001년 4월 후소샤(扶桑社)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으로 양국 갈등이 커지자 그해 10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에서 출범키로 결정됐다. 당시 쟁점은 독도영유권, 군대위안부, 한일강제병합에 대한 양국의 시각차 등 주로 근현대사 부분이었다. 하지만 2기 연구위 활동에서 이런 민감한 내용은 모두 의제로 채택되지도 못했다.

심각한 역사 인식의 괴리도 확인했다. 심지어 일본 측은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을 주도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다마키 현립 히로시마대 교수는 “1905년 11월 17일 어전회의에서 대신들은 조약체결의 거부를 주장했으나, 고종 황제가 ‘협상타판(교섭타협)’ 노선에 따라 협약안을 수정시켰고, 그에 따라 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이 체결됐다”고 강변했다.

식민지배하 노동자 동원에 있어서 강제와 폭력이 있었다는 것이 한국 역사학자들의 입장인 데 반해 일본 측은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강제연행 사실은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계도 있었지만 1기 연구위에 비해 2기 연구위에서 진일보한 성과가 나오면서 향후 일정에 관심이 쏠린다. 3기 연구위 출범 여부는 한·중·일 정상회담,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등에서 예정된 한·일 정상회담에서 결정될 전망이다.

이도경 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