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손수호] 絶版
입력 2010-03-23 18:05
출판사들이 앞으로 법정스님의 책을 찍지 않기로 했다. 문학의숲, 범우사 등 고인의 책을 펴낸 곳에서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한다. 다만 절판을 위한 절차와 과정, 시기에 대해서는 저작권을 가진 사단법인 맑고향기롭게 측과 조율해 나가기로 해 여운을 남겼다.
절판은 법정스님의 유언을 받들기 위한 것이다. 고인은 ‘남기는 말’에서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데 사용토록 해 달라. 그러나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애에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승려는 본래 ‘내 것’이라는 게 없는 신분이다. 유산이 없고 무덤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법정은 글을 잘 쓴 인기 저자였기에 사후 50년간 상당한 인세 수입이 생길 수 있는데, 이를 챙길 근거를 없애라는 게 유언의 요지다. 상속인으로서는 큰 재산의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법으로 따지면 이 유언은 계약위반이다. 출판사와 저자는 출판권설정계약에 따라 책의 출판에 따르는 여러 조건을 정한다. 여기에 사인하면 출판권은 출판사에 속한다. 책의 편집과 제작, 판매, 홍보 등의 권한은 출판사가 행사하고 저자는 인세를 받을 뿐이다. 저자와 상의는 할 수 있어도 책을 찍고 마는 것은 전적으로 출판사의 몫이다. 따라서 유언은 출판권을 침해하는 것이므로 지키지 않아도 되고 여차하면 계약위반으로 제소할 수도 있으니 법정의 책이 법정에 서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문제는 스님의 유언이 법률행위가 아니라 종교행위에 가깝다는 것이다. 지금 같은 추모 분위기에서 계약서 운운했다가는 ‘무소유’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고, 많은 출판사들이 법정 책으로 살림에 도움을 받았기에 냉가슴을 앓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유언을 문면 그대로 따를 게 아니라 ‘더 이상’ 부분 앞에 ‘계약기간이 지나면’을 넣어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 ‘무소유’가 고가에 거래되고, 해적판이 나도는 세속이 덜 어지러워진다.
법정스님의 절판 선언이 무소유의 완벽한 실현으로 여기는 이도 있으나, 내가 보기엔 유언이 오히려 마지막 말빚이 되고 만 듯한 느낌이다. 말은 생물이기 때문이다. 글도 세상에 한번 뿌려지면 관리가 어렵다. 책을 찍지 않는다고 글이 없어지지 않는다. 몸을 다비하듯 태울 수 없는 것이 말과 글 아닌가.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