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이홍규] 韓銀총재에게 있어야 할 지혜
입력 2010-03-23 18:01
신임 한은 총재가 내정됐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그 어느 때보다 한은 총재 임명에 관심이 컸고, 그러다 보니 논란도 많았다. 김중수 내정자는 학계와 관계를 넘나들며 학식과 경험을 쌓은 사람이어서 한은 총재 자격을 갖추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것만으로 안심할 수 없는 듯 보인다. 작금의 경제 상황에서 국민들이 한은 총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을 뛰어넘는 남다른 지혜다. 과연 한은 총재에게는 어떠한 지혜가 필요한가.
첫째, ‘때’(時)를 알아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며 우리는 경제 예측 능력이 얼마나 취약한가를 알게 됐다. 로버트 실러 교수의 말처럼 미래를 보는 눈은 안개 속을 헤매고 있다. 세계에는 지금 ‘출구전략’이 늦어지면 심각한 인플레이션에 직면할 것이라는 경고가 있는 반면 출구전략이 시행되면 1930년대 미국, 1990년대 일본이 겪은 장기 불황에 직면할 것이란 주장도 있다. 과연 빠르지도 늦지도 않을 시기가 언제냐 하는 것은 오리무중이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지금 700조원을 넘는 가계대출, 만성화된 청년실업, 심화된 양극화 구조, 북한 문제 등 경제위협 요소들이 즐비한 형편이다. 모두 해결이 쉽지 않은 과제이고, 통화정책의 타이밍이 중요한 문제들이다. 그 어느 때보다 한은 총재에게 시중(時中)의 지혜가 요구되는 시기다.
‘時·信·通’이 필요하다
둘째, 시장에 ‘신뢰’(信)를 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시장과 중앙은행 간에도 일종의 거래비용 문제가 존재한다. 월가의 신뢰를 받은 그린스펀은 말 한마디로 자신이 해야 할 정책목표의 반쯤을 달성했다. 한은 총재가 시장의 신뢰를 잃으면 시장은 그만큼 더 춤추게 될 것이고, 금리는 상승할 것이며, 인플레 압력은 증대될 것이다. 시장에 어떻게 신뢰를 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믿음은 전문성에서 나오지만 신뢰는 일관성에서 나온다. 단기적 인기 영합이 아닌 장기적 목표에 헌신할 때 나오는 것이다. 한은의 장기적 목표가 통화가치 안정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한은 총재야말로 시장에서 인간의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을 제어할 마지막 보루다.
셋째, 정부와 ‘소통’(通)을 할 지혜가 필요하다. 경제정책에는 통화관리와 경기부양, 그리고 단기와 장기간에 상반성이 존재하고 있다. 현재 세계는 저가 생산 시스템의 확대로 인플레 공포를 망각하고 있다. 그러니 경기부양 논리 앞에 통화가치 안정의 논리가 묻히기 십상이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임무는 파티가 시작될 때 펀치볼을 가져가 버리는 것이다. 경기부양의 파티가 무르익는데 그 흥을 깨는 것은 실로 쉬운 일이 아니다. 정치권이나 정부나 그 흥을 깨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펀치볼을 가져가려면 다른 의견을 가진 그들을 설득할 소통의 기술이 있어야 한다.
시·신·통(時信通)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너무 나가도 안 되고 너무 뒤처져도 안 되는 일이다. 신과 같은 존재였던 그린스펀을 인간으로 격하시킨 것은 저금리를 너무 오래 끌고 간 그 하나의 결정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상의 일에는 중용이 요구된다. 중용의 지혜를 가지려면 견제와 균형이 제대로 이뤄지게 해야 한다. 견제는 귀찮고 성가신 일이지만 잘못된 결정을 할 가능성을 감소시킨다.
언제든 자신의 목소리 내야
현 정부의 장점은 일사불란함이다. 일사불란함은 효율을 높이지만, 다른 의견들이 설 자리를 위축시킬 수 있다. 통화정책에도 일사불란함이 강조되면 출구전략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위축될 것이다. 목소리의 다양성이 약화되면 ‘검은 백조’가 출현할 위험이 증가되는 법이다. 그러기에 적어도 한은 총재에게는 언제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심리적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그것이 한은을 살리고, 경제를 살리고, 종국에는 정부와 국민을 살리는 길이 될 것이다.
이홍규 KAIST 교수 경영과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