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도야마 공장엔 남자들도 끌려왔었다
입력 2010-03-23 19:01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2부 낯선 기업, 숨은 가해자
① 근로정신대 징용의 주범 후지코시
후지코시 도야마 공장에는 조선 남자도 강제 동원됐다. 1945년 5월 말 이곳에 징용된 남자 공원(工員)은 1688명(‘후지코시 25년사’). 이 가운데 반도(半島) 출신이 419명이었다. 반도는 조선을 뜻한다.
남자도 후지코시 군수공장에서 일했다는 사실은 그동안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숫자가 조선여자근로정신대에 비해 훨씬 적었기 때문이다. 상당수가 북한 출신이라는 점도 작용했다. 국무총리 산하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지금까지 확인한 후지코시 남자 피해자는 9명에 불과하다.
피해자 고덕환(88·강원도 원주) 할아버지는 “함경북도 성진과 청진 회령에서 300여명, 전라도에서 온 200여명이 후지코시 공장에 있었다”며 “남자 징용자는 535명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후지코시 측 기록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적어도 조선 청년 400명 이상이 있었다는 게 공통분모에 해당한다. 그는 1944년 10월 끌려가 중노동을 하다 광복 두 달 후인 이듬해 10월 귀국했다.
후지코시에서 노역한 남자는 거의 모두 20대였다. 고 할아버지는 “당시 스물한 살은 군대에 가야 했고 스물두 살부터 징용으로 소집됐다”며 “한국 청년들을 데려가려고 일본 군수회사가 직접 내 고향인 성진에 왔다”고 증언했다. 징용 청년과 근로정신대 소녀는 같은 공장에서 일했지만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다. 남자들은 여동생 같은 소녀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고생하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안타까워했다.
청년들의 삶도 고달팠다. 월급을 받지 못해 집에서 가져온 비상금으로 공장 밖에서 죽을 사먹고 연명했다. 고 할아버지는 “지금은 개도 안 먹을 죽”이라며 “그 사람들(후지코시)은 징용으로 돈벌이가 됐겠지만 조선 사람은 착취를 당했다”고 분개했다.
특별기획팀=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