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규환 (10) 1970년대 말부터 여자아이들도 본격적 영입
입력 2010-03-23 17:28
초창기 은평천사원은 남자 아이들만을 대상으로 했다. 그러나 예외는 있었다. 원아 중 한 아이의 사정이 참 딱했다. 이 아이는 자신의 누이동생이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며 고생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당시 더부살이하는 아이를 친딸처럼 학교에 보내고 공부시켜 줄 가정은 흔치 않았다. 나는 결국 그 누이동생을 천사원에 데려오기로 했다. 그 아이는 성장해 경기도 여주에 있는 직업훈련소로 보내졌고, 직장을 구해 어엿한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됐다. 이후 그녀는 천사원에서 만난 남편과 결혼을 했는데, 나는 그 결혼식 주례를 맡았다. 그때의 뿌듯했던 기억은 해묵은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있다.
천사원에서 본격적으로 여자 아이들을 맞게 된 것은 1970년대 말부터였다. 61년 서대문시립병원이 들어서면서 결핵환자들이 천사원 인근에 집단으로 모여들었다. 못살던 시절, 결핵은 흔한 병이었다. 병실이 한정된 탓에 환자들은 6개월을 채우면 모두 퇴원하도록 돼 있었다. 오갈 데 없는 가난한 결핵환자들은 병원 근처인 구산동 산61번지에 천막을 치고 하나 둘 살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그곳은 점차 일군의 산동네로 변했다. 이른바 결핵환자촌이 만들어진 것이다.
어느 해 여름, 그곳의 몇 집이 수해로 쓸려 내려가는 참사가 발생했다.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 있던 대낮에 갑작스럽게 쏟아진 폭우가 원인이었다. 한 가정은 낡은 집이 무너지면서 그 안에 있던 남편과 아내 모두가 목숨을 잃었다. 그 집 딸이 둘이었는데, 두 자매는 당시 우리 원아들과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급우였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이 자매를 어찌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오갔을 테고, 얼마 뒤 동장이 날 찾아왔다. 자매를 받아달라는 것이었다.
“아시다시피 천사원은 남자 아이들만 있는 곳이라서….”
“원장님, 딱한 아이들 좀 돌봐 주세요. 다른 시설로 보내기도 마땅치가 않습니다.”
고민 끝에 이 아이들을 데려오기로 했다. 어린 애들이라도 남녀는 유별한지라 머물 곳을 따로 마련해 줘야 했다. 처음에는 혹시나 사내 녀석들이 일반 가정집에서 자란 여자 아이들을 괴롭히거나 짓궂게 굴지 않을까 걱정도 됐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급작스레 천애고아가 된 이 자매가 측은했던지, 남자 아이들이 은근히 챙겨주고 배려하는 것이었다. 남자들만 우글대던 천사원 분위기는 단지 여자 아이 두 명이 들어왔을 뿐인데도 사뭇 달라진 듯했다. 전에 비해 화사해지고 부드러워졌으며 알게 모르게 질서가 잡혀가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나중에는 본격적으로 여자 아이들이 머무를 집을 하나 더 지었다. 그리고 아동보호소에서 여자 아이 몇을 더 데리고 왔다. 그 가운데 차분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한 아이는 커서 의사가 되기도 했다.
여성 시설인 은평기쁨의집이 정식 개원한 것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07년의 일이다. 일반 아동 시설에 비해 많이 늦었다. 기쁨의집은 아기 때 버려지거나 서울시립아동병원에 수용 중인 부모 없는 여성 장애인들을 데려다 보호하는 것부터 시작됐다. 현재는 만 4세부터 41세의 무연고자 또는 1∼3급 여성 지적장애인들이 함께 생활하는 집이 됐다.
정리=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