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4000여권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증 이규용씨 “책 좋은 곳으로 시집보내 마음 뿌듯”

입력 2010-03-22 19:04


“손때 묻고 추억이 깃든 책들이 눈에 보이지 않아 허전하지만 좋은 곳으로 시집보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뿌듯하네요.”

일제 시대 때 출간된 소설류 등 소장 도서 4000여권을 국책연구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옛 정신문화연구원)에 기증한 이규용(64·서울 자양2동·사진)씨는 22일 소감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이씨는 자택과 어머니 집에 보관해 오던 장서들을 지난 19일 탑차 2대(5t 1대, 1t 1대)에 실어 연구원으로 보냈다. 고등학교 때부터 틈틈이 모아온 문학, 미술, 광고, 인문 분야 서적과 잡지류 등이다.

1939∼40년 출간된 벽초 홍명희의 소설 ‘林巨正’(임꺽정) 초간본 1∼4권, ‘금삼의 피’ ‘다정불심’ ‘여인천하’ 등 월탄 박종화의 40∼50년대 소설, ‘조선총독부’ ‘대한제국’ 등 유주현의 소설 등은 이씨가 애지중지하던 장서들이었다. 6호까지 나오고 끊긴 60년대 동인지 ‘문장가’와 미 8군이 발행한 ‘자유의 벗’,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펴낸 영문 월간지 ‘코리아저널’ 등 각종 잡지와 국내외 미술 도록 및 화집(畵集), 광고 관련 서적 등 ‘먹을 것 안 사먹고, 아껴가면서’ 어렵게 모은 책들이다.

이씨는 “기증하겠다고 막상 결심했지만 후에도 갈등이 있었다. 책이 실려 나갈 때는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책을) 끼고 앉아 있는 건 욕심이다. 내가 수집한 책을 다른 사람들이 유익하게 이용할 수 있다면 그게 더 보람 있는 일이 아니냐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말했다.

이씨의 장서 기증은 본보가 다리를 놓았다. ‘보유한 장서를 보다 많은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책임지고 관리해 줄 수 있는 곳을 찾고 있다’는 본보 보도(2009년 12월 12일자)가 나간 뒤 연구원 측에서 기증을 요청해 와 성사됐다.

이씨는 연구원에서 책을 잘 관리해 줄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못난 주인 만나서 곰팡이 냄새 풍기던 책들이었는데 이제 좋은 주인을 만나 다행입니다. 도서관에서 정기적으로 훈증 소독도 하고, 사우나도 하면서 살게 됐으니 이제 제 책들도 호강하게 된 거죠.”

연구원은 기증 도서 분류작업을 거쳐 오는 7월쯤 이씨 이름으로 된 개인 문고를 설치해 운영할 계획이다.

라동철 기자 rd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