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동재] 총성없는 참치전쟁

입력 2010-03-22 18:01


1994년 3월 19일 판문점 남측 지역 평화의 집. 남북 특사 교환을 위해 열린 양측 실무대표 회담에서 북측 박영수 단장은 불쑥 폭언을 퍼부었다. “여기서 서울은 멀지 않다. 전쟁이 나면 (서울도) 불바다가 되고 말 것이다.”

1993년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추가 핵사찰에 반발하며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했다. 이후 북·미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고 일촉즉발의 군사적 대치 상황까지 빚어질 정도로 한반도에는 긴장감이 계속되던 터였다. 이래저래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던 국민들은 ‘서울 불바다’ 발언 이후 생필품을 사재기하기에 바빴다. 당시 판매고 1, 2위를 차지했던 비상식량은 라면과 참치통조림이었다. 1980년대에 선보인 참치통조림이 빠른 속도로 우리네 서민의 식탁에서 단백질을 제공하는 친근한 식품으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참치라는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 설이 그럴듯하게 알려지고 있다. ‘물고기의 세계’ ‘한국어류생태학’ 등의 저서를 남긴 어류학자 정문기 박사는 “광복 직후 해무청의 한 어획 담당관이 어디선가 동해안의 사투리인 참치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보고서에 기록함으로써 비롯된 것”이라며 “이 물고기의 우리나라 표준명은 다랑어”라고 회고했다. 수산업계에서 전해지는 얘기는 다르다. 1957년 우리나라의 첫 원양어선 지남호가 인도양에서 참다랑어를 잡은 뒤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다른 어류들과 구별하기 위해 고민 끝에 참다랑어의 일본식 이름인 마구로(眞黑)의 ‘참’ 진(眞)에서 참을 따고 그 뒤에 ‘치’를 붙인 게 굳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지난 18일 카타르 도하에서는 지구촌의 관심이 쏠렸던 중요한 안건 하나가 표결에 부쳐졌다. 지중해를 포함한 대서양의 참치와 북극곰에 대한 국제 거래를 금지시켜야 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유엔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의 국제 무역에 관한 협약(CITES)’ 회의에 참석한 세계 175개국 대표단이 표 대결을 펼쳤지만 결과는 부결이었다.

전 세계 참치 어획량 중 3분의 1을 소비하는 참치 대국 일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본, 대만과 함께 세계 3대 참치 어획국인 한국도 가슴을 쓸어내렸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미국 정부와 세계 환경단체 등은 즉각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특히 “대서양의 참다랑어 개체수가 50년 전에 비해 74%나 줄었다”며 “멸종위기종으로 규정하고 국제 거래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모나코는 앞으로도 집요하게 이 문제를 물고 늘어질 태세다. 국제 비정부기구(NGO)인 세계자연보호기금(WWF)은 “전 세계 레스토랑과 소매업자, 소비자에게 참다랑어 매매나 섭취를 중단하는 운동을 벌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미국도 “대서양의 참다랑어 보존을 위해 계속 싸울 것”이라고 거들었다.

이번에 현안이 된 참다랑어는 참치류 중에서도 주로 횟감으로 쓰이는 최고급 어종이다. 참치는 농어목 고등어과에 속하는 물고기다. 최근 들어 수요가 급증하면서 등이 푸르고 큰 생선은 모두 참치로 불리기도 한다. 횟감용은 참다랑어, 황다랑어, 눈다랑어가 꼽힌다. 가다랑어는 주로 통조림용으로 쓰인다. 가장 아래 급으로 치지만 황새치, 청새치, 흑새치 등 새치류도 참치류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환경 보호를 중시하는 현재의 기류를 감안할 때 앞으로도 참치잡이 금지를 둘러싸고 지구촌에서 벌어질 총성 없는 전쟁은 더욱 치열하게 계속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향후 대서양 참다랑어의 국제 거래 금지가 현실화된다면 파장은 적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지중해와 대서양뿐만 아니라 다른 해역에서 잡는 참다랑어를 포함한 다른 참치종도 보존 대상으로 지정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대서양과 태평양 등에서 참다랑어를 잡아 주로 일본에 수출하는 국내 원양업계가 직접적인 타격을 받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여행이나 야영 준비를 할 때면 자연스럽게 배낭 한구석에 밀어 넣어 왔던 참치통조림이 ‘서민들이 가까이 하기엔 너무 비싼 고급식품’이 될까 걱정스럽다.

이동재 선임기자 dj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