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 옛 그림] (12) 외할머니의 외할아버지

입력 2010-03-22 18:00


옛날 인장이다. 그림 대신 웬 인장을 들고 나왔나 하는 분도 있겠다. 예부터 시서화에 두루 솜씨 있는 사람을 ‘삼절’이라 했다. ‘사절’은 ‘인(印)’을 넣어, ‘시서화인’이다. 그림은 높이 치고 도장 파는 일을 하찮게 보면 윤똑똑이 소리 듣는다. 돌이나 나무에 글 그림을 새기는 전각은 어엿한 예술이다.

전각의 새김질은 두 가지다. 붉은 글씨의 돋을새김과 흰 글씨의 오목새김이 있다. 지금 보이는 것은 ‘주문방인(朱文方印)’이다. 붉은 글씨에 네모난 도장이란 뜻이다. 흔히 이름은 백문(白文), 호는 주문으로 새긴다. 이 인장은 아호인(雅號印)일 텐데, 무슨 호가 이토록 길다는 말인가.

해석부터 해보자. ‘청송 심씨, 덕수 이씨, 광산 김씨, 은진 송씨, 해평 윤씨, 연안 이씨, 남양 홍씨, 안동 권씨가 오로지 조선의 큰 성씨이다. 나의 내외가(內外家) 팔고조(八高祖)가 여기서 나왔다.’ 호가 아니라 집안 성씨를 밝힌 인장이다. 이를테면 ‘인장에 새긴 가계도’라 할까. 여기 여덟 성씨에 드는 독자는 반갑겠다.

가문의 내력을 엉뚱스레 인장에 새긴 이는 누군가. 18세기 문인 심사검이다. 그는 잘난 성씨를 뻐기려고 인장을 만들었을까. 천만에, ‘팔고조’를 추념하기 위해서다. 조선에서 양반 축에 들려면 여덟 분의 고조까지 올라가는 가계를 욀 줄 알아야 했다. 조부의 조부 외조부, 조모의 조부 외조부, 외조부의 조부 외조부, 외조모의 조부 외조부가 팔고조인데, 부모까지 합쳐 서른 분이다. 손꼽기도 벅찬 조상들을 옛 어르신은 아랫대에 조곤조곤 일러주셨다.

문벌 자랑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조선을 ‘네트워크 사회’라 한다. 선조들은 가문의 그물코를 넘나들며 문안 여쭙고 마음에 뫼셨다.

요즘 고조부의 함자를 잊은 작자도 있다. 그런 반거들충이들이 희한하게도 친이계, 친박계, 친노계는 주르륵 꿴다. 괘꽝스런 일이다.

손철주(미술칼럼니스트·학고재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