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문일] 사형, 그 껄끄러움
입력 2010-03-22 18:03
“인권운동가들의 구호보다 평범한 국민의 도덕관념이 존중되는 사회라야 한다”
박정희 정권에서 법무장관을 지낸 황산덕씨는 재임시 사형집행 명령서에 일절 사인을 하지 않았다. 흉악 범죄자에 대한 사형 집행이 아무런 반감을 일으키지 않을 때였다. 법학 교수 출신의 그가 사형집행에 반대한 것은 법학이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교적 가치관에 따른 것이었다. 결국 적체된 명령서는 후임 장관이 결재해야 했다. 책임이 따르는 자리를 받아들이고서도 그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은 올바른 처신이 아니다. 종교적 신념을 앞세우려면 애초에 장관직을 사양했어야 한다.
유영철 강호순 조두순 김길태 같은 흉악 범죄자가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는데도 사형제 폐지와 사형집행 반대 주장이 수그러들지 않는다. 그 주장에는 논리보다 ‘생명의 소중함’이라든가 ‘인권 보호’ 같은 감정적 구호가 더 소리가 크다. 그러나 국민의 일반적 도덕관념은 사형제를 지지하고 있다. 최근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의 여론조사에서 83.1%가 사형제를 찬성했다. 그럼에도 법정에서는 흉악범에 대한 형량이 경감되는 추세다. 특히 사형 판결은 연쇄살인이나 대량살인 범죄가 아니면 나오기 어렵게 됐다.
여기에는 법관들의 온정주의(溫情主義)가 작용하고 있지 않을까. 범죄자에 대한 온정도 있지만, 극형을 내릴 때의 심리적 부담을 회피하려고 자신에 대해 베푸는 온정이 있을 것이다. 총독 빌라도가 예수의 죽음은 자신과 관계없다고 선언한 마음처럼. 최근 보성어부 사건의 재판부가 제청한 사형제 위헌심판에 대해 합헌 결정이 나왔지만 재판관들의 논리는 1996년 첫 결정에 비해 많이 물러졌다. 만약 다음 번 위헌심판이 제청된다면 위헌 결정이 쉽게 나올 수도 있다.
사회계약설에 따르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전개되는 자연 상태에서의 위험과 불안을 피해 인류는 국가를 만들었다. 개인은 신체나 재산의 피해를 당했을 때 국가가 대신해 가해자에게 합당한 처벌을 해 줄 것으로 믿고 사적인 복수를 포기한다. 형벌권을 위임받은 국가는 범죄자에 대해 응보(應報)의 처벌을 함으로써 정의를 실현한다. 범죄 중 가장 중대한 게 생명과 관계된 살인이다. 살인에 대한 응보는 똑같은 값이 아니고선 만족되기 어렵다. 거의 1대 1 대응이 이뤄졌던 전통사회와 달리 근대사회에서는 살인범의 인권과 교화를 우선시해 극형을 피한다. 그럼에도 지금의 무조건적인 사형폐지론은 폐지 자체가 목적이 되어 있는 듯하다. 만약 국가가 형벌권을 정당하게 사용하지 못하면 극단적으로 사적 복수를 감행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우리나라는 1998년 이래 13년째 사형 집행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적 이유로 사형수가 되었던 자신의 경험 때문에 사형 집행을 금지한 데서 비롯됐다. 17대 국회에서 유인태 의원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판결을 받았던 자신의 전력에서 사형폐지안을 발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경우는 정치범에게 사형을 내리지 못하도록 하면 될 것인데도 자아를 과잉 실현하려고 했다. 사형반대는 이른바 진보적 가치 중 하나여서 노무현 정권에서도 사형집행은 회피됐다. 최근 이귀남 법무장관이 사형집행 가능성에 운을 떼자 즉각 민주당이 반대하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류문명의 모범생을 자처하는 유럽은 외교 무대에서 사형제 폐지를 ‘유럽의 가치’로서 전파하고 있다. 한국을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고무 찬양한 앰네스티는 중세시대 극형의 백과사전 격이었던 영국에서 비롯된 운동이다. 프랑스도 마찬가지로 세계의 인권 헌병 역할을 하고 있다. 과거 영토 제국주의가 정신의 제국주의로 발전된 셈이다. 사형제를 통상과 연계시켜 압력을 넣고 있다.
한국은 그다지 선진국이라고 자부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유독 사형 반대운동이 강하다. 여기에는 조선시대의 가혹한 통치에서 비롯된 사회적 반발 유전자, 일제 강점기 이민족 지배하에서 반권력 감정이 작용한다. 이제는 정치 외교적 요인까지 얽혀 알렉산더 대왕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이 됐다. 이 정권이 풀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
문일 논설위원 norw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