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CEO 리더십-(10)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 회장]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보다 ‘빚 없는 경영’ 결실
입력 2010-03-22 21:22
‘거화취실(去華就實·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을 배제하고 내실을 지향한다)’
신격호(88) 롯데그룹 회장의 지론이자 좌우명인 이 말은 그의 경영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주변에서 명실상부한 그룹이 되려면 중공업이나 자동차 같은 제조업체가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조언하자 신 회장은 “무슨 소리, 우리의 전공분야를 가야지”라며 일축했다고 한다.
“잘 하지도 못하는 분야에 빚을 얻어 사업을 방만하게 해서는 안 된다. 잘 알고, 잘 할 수 있는 분야에서 미래 사업 계획을 강구해 신규사업 기회를 선점해야 한다.” 이 같은 경영철학은 롯데를 ‘빚 없는 경영’으로 유명한 재무구조가 튼튼한 기업으로 만들었다. 롯데는 한국에서 1967년 롯데제과를 시작으로 호텔롯데, 롯데쇼핑 등을 잇달아 창업 또는 인수하면서 지난해 말 현재 58개 계열사를 거느린 연 매출 45조원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롯데신화의 시작은 ‘성실함’과 ‘신용’=1922년생인 신 회장은 창업 1세대 중 보기 드문 ‘현역’이다. 90을 앞둔 지금도 홀수 달은 한국에, 짝수 달은 일본에 머물며 계열사를 챙기는 ‘셔틀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경남 울산 삼남면 둔기리에서 5남5녀 중 맏이로 태어난 그는 만 20세가 되던 해 단돈 83엔을 들고 일본행 관부연락선을 탔다. 신문, 우유배달로 생계를 이어가던 신 회장은 조선인이라는 불리한 여건을 ‘신용’으로 극복했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확한 배달시간으로 유명했다. 주문이 늘어 배달시간을 맞추기 어려워지자 직접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시간을 맞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1944년 평소 신 회장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전당포 겸 고물상 주인 하나미쓰가 찾아와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군수용 선반 오일이 품귀상태다. 자네가 공장을 차려 제조해보겠다면 5만엔을 출자할 용의가 있다.”
신 회장은 제안을 받아들여 사업을 시작했지만 공장은 본격적으로 가동해보기도 전에 연합군 폭격으로 잿더미가 됐다. 빚 갚을 길이 막막해진 신 회장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5월 비누와 포마드를 제조하는 연구소를 설립했다. 물자가 부족했던 시절이라 곧 큰 돈을 벌었다. 그는 바로 빌린 돈을 갚고 고마움의 표시로 집 한 채를 선물했다. 신 회장은 훗날 “당시 나는 사업을 한다기보다는 어떻게든 돈을 빨리 벌어 보답하겠다는 마음뿐이었다”고 회고했다.
◇문학 지망생에서 사업가로 변신=그 무렵 신 회장은 문학 지망생이었다. 틈만 나면 도쿄 간다 거리의 헌책방으로 달려갔다. 하루 종일 선 채로 문학 전집류를 읽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책은 사서 밑줄을 그어가며 독파했다. ‘작가가 되고 싶다. 그것이 어렵다면 우선 신문기자가 되고 싶다’는 게 그의 꿈이었다. 그의 고학생 시절을 곁에서 지켜본 류찬우 풍산그룹 회장은 “그 시절 신 회장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하지만 타고난 사업 감각은 숨길 수 없었다. 종전 후 미군이 주둔한 일본에서 껌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신 회장도 껌 사업에 뛰어들며 자본금 100만엔, 종업원 10명의 법인 사업체 ‘롯데’를 설립했다. 롯데라는 사명은 그가 젊어서 감명 깊게 읽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이름 ‘샤롯데’에서 따왔다. “베르테르는 샤롯데에 대한 정열 때문에 즐거웠고 때로는 슬펐으며 그 정열 속에 자신의 생명을 불사를 수 있었습니다. 일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정열이 있으면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도 즐겁게 이겨낼 수 있지만, 정열이 없으면 흥미도 없어지고 일의 능률도 없어집니다. ”
신 회장은 “내가 회사 이름을 롯데로 선택한 것은 내 일생 최대의 수확이자 걸작의 아이디어였다”고 술회했다. 당시 서구문명의 상징인 껌에 대한 일본인들의 비난은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신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껌의 핵심 타깃은 어른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이었다. 롯데는 풍선껌을 작은 대나무 대롱 끝에 대고 불 수 있도록 껌과 대롱을 함께 포장해 판매했다. 변변한 장난감이 없던 시절 롯데의 풍선껌은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1960년대 일본 가정에서 손님 접대용 과자 센베이가 초콜릿으로 대체될 기미를 보이자 신 회장은 즉각 초콜릿 사업에 발을 들였다. 유럽에서 초콜릿 제조 시설과 내로라하는 기술자들을 데리고 와 초콜릿 시장을 장악했다. 이후 롯데는 캔디, 비스킷, 아이스크림, 청량음료 부문에도 진출해 성공을 거듭했다.
1965년 한·일 수교 후 신 회장은 1967년 한국에 롯데제과를 설립했다. 설립 당시 신 회장은 “새롭게 한국 롯데 사장직을 맡게 되었사오나 조국을 장시일 떠나 있었던 관계로 서투른 점도 허다할 줄 생각되지만 소생은 성심성의, 가진 역량을 경주하겠습니다. 소생의 기업 이념은 품질본위와 노사협조로 기업을 통하여 사회와 국가에 봉사하는 것입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롯데는 롯데제과에 이어 1970년대 롯데칠성음료와 롯데삼강을 설립하면서 국내 최대 식품기업으로 성장했다. 이어 롯데호텔, 롯데월드를 잇따라 개장하면서 ‘부존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는 기필코 관광입국을 이뤄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에 옮겼다.
◇아시아를 선도하는 글로벌 기업으로=2004년 정책본부장을 맡으면서 실무적인 정책 수립에 참여하고 있는 신 회장의 차남 신동빈(55) 부회장은 롯데의 ‘글로벌화’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인물이다.
롯데백화점은 올해 1조4000억원을 글로벌 사업 진출에 투자할 계획이다. 현재 모스크바와 베이징에 해외 1·2호점을 두고 있는 롯데백화점은 내년 문을 열 중국 톈진에 3호점 공사를 진행 중이다.
롯데마트는 지난해 중국 토종 대형마트 체인 ‘타임스’를 인수하면서 국내 유통업체 중 최대 규모의 중국 점포망을 확보했다. 현재 해외 101개점(중국 81개, 베트남 1개, 인도네시아 19개)과 국내 84개점(GS마트 포함) 등 총 185개점을 운영하고 있다. 롯데호텔은 다음달 해외 첫 체인인 6성급 호텔 ‘롯데호텔모스크바’와 실속형 비즈니스호텔 ‘롯데시티호텔킨시죠’ 개장을 앞두고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다.
‘금융업 강화’는 신 부회장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2007년 대한화재(현 롯데손해보험)를 사들였고 2008년에는 국내 최대 투자자문사인 코스모투자자문 지분 21%를 인수했다. 롯데에 입사하기 전 1980년대 7년간 노무라증권에서 일하면서 쌓은 경험이 금융업 진출 확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대외활동의 폭도 점차 넓어지고 있다. 신 부회장은 아시아와 미국의 교류를 주도하는 아시아소사이어티 코리아센터 회장을 맡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한일경제협회 부회장인 그는 지난해 9월부터 한국방문의해위원회 위원장도 맡고 있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