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규환 (9) 사회복지 ‘외길’ 노력… 서울 시설연합회장 당선

입력 2010-03-22 21:27


은평천사원 원장으로 취임하고 7년쯤 지났을 때, 나는 미국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의 친구인 르밴(Levan) 박사를 만나 교제했다. 대구 계명대 영문학 교환교수로 온 그는 주말이면 가끔 서울에 와서 천사원을 찾았다. 르밴 교수는 유대계 미국인이었는데, 나는 당시 유대인에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대화를 나누려 했다.

오랜 세월 동안 제 나라 없이도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았고, 오늘날 노벨상 수상자 3명 중 1명을 배출하는 민족, 세계를 움직이는 이 민족의 저력은 나에게 있어 늘 호기심과 경이로움의 대상이었다.

르밴 교수에게 세계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유대인들의 저력과 비결을 물었다.

“한국에 있는 하나뿐인 친구인데 방법 좀 알려주시오.”

그랬더니 그는 “조 원장은 어떤 것에서 일등이 되고 싶냐”고 되묻는 것이었다.

“사회복지사업에서 단연 최고가 됐으면 하지요.”

“음, 그럼 내가 하라는 대로 하겠소?”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재차 약속한 뒤에야 그는 말문을 열었다.

“그럼 지금 바로 실행하시오. 이제부터 조 원장은 사회복지만 생각해야 하오. 책도 사회복지에 관한 것만 읽고, 다른 데 시간 낭비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시오. 계속 그렇게만 한다면 꿈을 꿔도 사회복지에 관한 것만 꾸게 될 것이고, 항상 좋은 아이디어가 생길 것이오.”

나는 그의 말을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가 오늘날의 천사원으로 이어진 게 아닌가 생각한다.

1975년 나는 서울시 사회사업시설연합회 회장에 출마했다. 당시 43세로 비교적 젊은 축에 들었다. 그때까지 원로들이 회장을 맡는 것이 대세였기에, 내가 회장 선거에 나선 것만으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많은 표차로 당선됐다. 그러나 곧 원로와 중진 원장들의 반대에 부닥쳤다.

나는 영향력을 지닌 원장 9명의 자택을 차례로 돌아다니며 간곡히 도움을 요청했다. 결국 이들 전원이 협조하겠다며 호의적 자세로 돌아섰고, 나는 회장으로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 일 중 하나는 김기창 화백, 이방자 여사 등 유명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한 점씩 얻어 전시회를 여는 것이었다. 그림을 판매한 수익금으로 시설 아동들의 장학금을 마련했다.

그 무렵 나는 당시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과 그 부인인 이형자 권사를 알고 지내게 됐다. 이 권사는 신앙생활에 열심일 뿐만 아니라 사회복지에도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그는 어느 날 대한생명, 신동아건설 등 회사 임원 부인들이 모이는 자리에 나를 초청해 시설 운영에 관한 어려움을 직접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그리고 고아원 원장들이 월급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내 설명을 듣고 바로 후원 제안을 하셨다.

“제가 원장님들을 후원할게요. 용기내세요. 한 달에 5만원씩이면 어떨까요?”

5만원은 당시 꽤 큰돈이었다. 내가 알기로 민간에서 시설 원장들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원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거듭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후 서울지역 시설 원장들과 만나 논의를 한 끝에 매달 개별적으로 지원을 받기보다 복지 기금을 마련하는 데 쓰기로 결정했다. 원장은 총 50명이었지만, 후원금은 넉넉하게 매달 300만원씩 지원됐다. 이 돈은 원장들의 긴급 치료비나 장례비 등을 위한 기금으로 적립됐다.

정리=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