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규환 (8) 자체 수익 조달 위해 화훼 재배… 화원도 직영
입력 2010-03-21 17:24
1960년대 초 보이스카우트 소년단은 웬만한 중산층 이상이 아니고선 자녀들을 참여시키기 어려웠다. 서울사대부고 배재고 서울고 경복고 경기고 등 서울지역 일부 명문학교에만 있는 것으로 인식되던 때였다. 고아원 안에 보이스카우트 유년대, 소년대, 연장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일반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자 했던 이 시도는 성공적 결과로 이어졌다. 은평천사원 59연장대는 잼보리 등 보이스카우트 행사 때마다 우수 소년단으로 표창을 받는 등 그 활약이 정말 대단했다. 나는 지금도 늘 자랑삼아 얘기하곤 하는데, 천사원 보이스카우트는 한국에서 제일가는 소년단이라 할 수 있었다. ‘범단원’은 보이스카우트 최고의 영예였다. 모두 21개의 기능을 인정받아야 범단원이 될 수 있었는데, 당시 범담원은 국내에 15명뿐이었다. 천사원 보이스카우트는 제16호에서 23호까지 모두 8명의 범단원을 줄줄이 배출했다. 이는 원아들의 자존감과 자긍심을 끌어올렸다. 소년단원으로 활동했던 아이들 가운데는 현재 세계적 명성을 얻은 박사와 교수, 목사와 기업가 등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밴드부는 서울지역에서 천사원이 처음으로 조직한 것이었다. 34인조로 구성된 밴드부는 그 실력을 인정받아 KBS TV에 출연했고, 보이스카우트 총재였던 김종필 공화당 의장의 환영식 음악 연주를 맡기도 했다.
15세 이상 아이들을 중심으로 꾸린 4-H클럽은 양, 돼지, 오리, 토끼 등을 직접 길렀으며 채소나 꽃을 재배하는 일도 도맡았다. 애초 시작할 때는 자본금이 없어 여기저기 돈을 빌려다 온실도 짓고 축사도 만들었다. 가축과 채소는 천사원에서 식용으로 쓰거나 시중에 판매했다.
천사원 최초의 자체 수익사업인 화훼 재배는 미국 감리교 해외구제회(MCOR)의 지원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 이를 발전시키는 데는 한 미국인 후원자의 힘이 컸다. 1966년 어느 날 주한 미대사관을 통해 미네소타 출신의 월터 먼데일 상원의원이 2000달러를 보내왔다. 그는 나중에 부통령까지 지낸 인물인데, 모친 장례식을 치르고 모인 조의금을 우리에게 후원한 것이었다. 2000달러면 당시 꽤 큰 돈이었다. 나는 그 돈으로 온실을 확장키로 했다. 그리고 비교적 쉽게 기를 수 있는 장미를 비롯해 고무나무와 연산홍 등으로 재배 품종을 늘렸다. 71년에는 국내 최초로 관음죽, 소철을 일본에서 수입해 재배하기도 했다.
상품이 점차 다양해지면서 직접 판로를 개척해야겠다는 계획이 섰다. 그래서 인사동에 처음으로 꽃 가게를 열었다. 이후 서대문 대신학교 앞에 두 번째 가게를 열었고, 감리교 총리원의 배려로 태평로 감리회관 앞 공터에 가건물을 지어 ‘천사화원’도 개원했다. 축하화분, 화환, 조화 등을 판매하면서 얻은 수익은 점차 천사원 운영비 3분의 1을 충당할 정도가 됐다.
중·고생만 150명이 넘을 정도로 원아들의 수는 계속 늘었다. 그러나 정부보조금은 턱없이 적었다. 아이들의 학비는 천사원에서 모두 책임지고 있었는데, 의욕과 열정이 있는 아이들이 대학 진학이나 유학을 원하는 경우에는 어렵지만 끝까지 지원해 줬다. 부모 없는 아이들도 꿈을 가지고 노력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싶었다.
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