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교회 개척기] ‘진실의 말도 지혜롭게’ 말 조심의 교훈 큰 힘돼

입력 2010-03-19 17:46


김상복 목사(할렐루야교회)

미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하던 날 졸업장을 들고 예배실 문을 막 나서는데 누군가 “미스터 김, 축하합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뉴저지 트렌톤에 있는 콕스 장로가 나의 졸업을 축하하러 온 것이다. 콕스 장로는 내가 이제 졸업을 했으니 자기네 교회의 목회자로 와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목회의 경험도 비전도 없다”며 정중히 사양했다. 한 달 동안이나 실랑이를 하다가 도저히 피할 길이 없어 대학원 공부를 하는 1년간만 목회를 하고 그 후엔 다른 주로 더 공부하러 떠난다는 조건하에 목회를 시작했다. 갓 태어난 딸 하나를 데리고 아내와 나는 목사관으로 이사했다.

하루는 주일예배 후 콕스 장로 댁에 점심 초대를 받아 갔다. 장로님 부인과 그녀의 언니가 동참했다. 그 언니는 65년간 싱글로 살아온 교회의 피아니스트였다. 점심을 잘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대화가 진행중인데 한국에 대한 질문들이 있어 대답을 하다가 1959년에 그 교단 대표 목사님이 방한했을 때 얘기가 나왔다. 그때 나는 그분을 모시고 열흘간 전국 순회 통역을 했다. 그분은 당시 한국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들은 정보를 미국의 방송을 통해 그대로 이야기했다가 미국 교계 지도자들로부터 ‘거짓말을 한다’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었다. 장로님 가정도 방송으로 들어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나는 한국 목사님들이 잘못된 정보를 전달해 그 목사님이 어려움을 입었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피아니스트 할머니가 “그 목사님을 비난했다”며 나에게 화를 벌컥 냈다. 나는 무척 당황했다. 한국 목사님들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 목사님은 이 할머니에겐 신과 같은 존재였는데 그분에게 실수가 있었다는 말을 용납할 수 없는 것 같았다. 피아니스트는 그날부터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예배를 마치고 나면 이것저것 노골적으로 트집을 잡았고 말끝마다 나를 비난했다. 한국인 목회자에게 미국 교회의 첫 목회는 고통 그 자체였다.

그러던 어느 주일 연세가 많으신 노회장 목사님이 설교를 하러 왔다가 장로님 가정에서 점심식사를 하던 중에 그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나를 찾아온 노회장에게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해 드렸다. 노회장은 격려와 함께 이런 말씀을 내게 해주셨다. “어떤 말은 안 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은 때가 있지. 진실이라도 아무 때나 말한다고 먹혀 들어가는 것이 아니야. 목회자는 특별히 말의 지혜가 있어야 돼.” 나는 그때 겨우 29세였고 목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햇병아리였다. 내가 약속한 1년이 되어 떠나는 날까지 그 할머니 한 분에게 잘못 보여 마음고생을 무척이나 했다. 목회 초년에 말 때문에 단단히 시련을 당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때 이후 나는 평생 말을 극히 조심하는 습관이 생겼고 말을 조심하는 습관은 나의 목회에 많은 고난을 면하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