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침묵의 땅에서 만난 大作의 숨결… 최하림 시인의 ‘러시아 예술기행’

입력 2010-03-19 17:25


원로 시인 최하림(71)이 2004년과 2006년 두 차례 러시아를 여행한 기록을 ‘최하림의 러시아 예술기행’(랜덤하우스)으로 펴냈다. 첫 여행은 시인의 아내와 소설가 정길연 김이정 등이 함께 했고, 두 번째 여행은 시인 이달희 김윤배, 소설가 임동헌, 화가 남궁도 등이 동참했다. 두 번 다 인솔은 김창진 성공회대 정치학과 교수가 맡았다. ‘첫 번째 러시아’와 ‘두 번째 러시아’로 구성된 책에는 러시아에 새겨진 시인의 걸음걸음이 오롯이 담겨있다.



“시베리아는 검은 몽상과 검은 침묵의 땅이다. 러시아의 모든 작가와 시인들은 시베리아의 검은 몽상을 경험하고서 러시아의 대작가가 된다. 도스토에프스키도 체호프도 스카초프도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하거나 시베리아에서 살거나 시베리아를 경험했다. 그들은 수백 리 자작나무 숲을 헤맸다”(26쪽)

시인이 러시아를 방문한 건 그 몽상과 침묵의 땅을 경험하고 대작을 써낸 러시아의 예술가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시베리아를 거쳐 페테르부르크로 간 시인은 도스토예프스키를 찾아간다. 센나야 광장 길의 비좁은 골목 모퉁이에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기념관에서 시인과 일행들은 초라한 외관에도 불구하고 대작가의 고뇌가 묻어나는 공기에 눌려 말을 잊는다. 도스토예프스키와 관련된 특별한 물건이 없음에도, 시인은 문학적 감성으로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이반과 알료샤, ‘악령’의 샤토프의 혼을 느낀다. 또 도스토예프스키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 보냈던 지옥과도 같은 나날을 떠올린다.

1960년대 초, ‘전쟁과 평화’를 읽은 후부터 톨스토이의 생가와 묘지에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자칭 ‘톨스토이의 사도’인 시인은 야스나야폴라냐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는 톨스토이가 걸었던 오솔길을 걸으며, 톨스토이가 맞았던 바람을 스쳐간다. 그리고 노름꾼이며 고집불통에 욕심꾸러기였던 톨스토이가 ‘사랑의 인간’으로 변해간 인생 여정을 되짚는다.

시인과 일행은 릴케 푸시킨 체호프 파스테르나크 타르코프스키 등의 작가 뿐 아니라 음악가인 쇼스타코비치도 찾아간다.

이 책은 시인의 러시아 예술가 탐험기인 동시에 그들에게 바치는 찬가다. 그는 러시아 대문호의 생가와 묘지, 기념관 등을 둘러보며 작가의 생애를 반추하고, 고뇌를 들여다보며, 예술혼을 느낀다. 그들이 어떤 역정을 거쳐 대작가가 됐으며, 어떻게 명작을 남길 수 있었는지에 대해 시인은 그들의 땅에 서서 깊고 조용히 성찰하며, 그 사유의 결과를 우리에게 자상하게 알려준다.

예술가를 찾아가는 길에 펼쳐지는 러시아 풍경에 대한 묘사와 시인이 풀어내는 예술가의 생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시인 최하림과 함께 그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만큼 생생하다. 예술을 사랑하는 시인이 쓴 여행기의 특별함일 터이다. 2002년 경기도 양평에 정착한 시인은 지난해 간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다.

양지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