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 아파트에 살면서 우울증·판단장애·병적 도벽… ‘클렙토매니아’ 할머니
입력 2010-03-18 19:30
17일 오후 7시45분쯤 서울 하계동 노원경찰서 형사과. 경찰관과 마주 앉은 박모(69·여)씨는 외모와 몸가짐에서 부티가 흘렀다. 키 155㎝에 마른 체구의 박씨는 단아했다. 낙타색 바지에 감색 외투를 걸쳤고, 반들거리는 검정 고급 손가방을 허벅지 위에 올려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할머니, 왜 하필 면도날을 훔치셨어요?” 경찰이 묻자 박씨는 “저도 모르겠어요. 순간적으로 나쁜 마음이 들어서…”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박씨는 조사 받는 내내 아랫입술을 심하게 떨었다.
박씨는 이날 오후 3시쯤 상계동 모 대형매장에서 면도날을 훔치다 잡혔다. 11만8300원어치를 손수레 바닥에 깔고서 계산대를 몰래 빠져나가려 했다. 매장이 혼잡한 틈을 노렸지만 점원에게 들켰다.
박씨는 지난 5일에도 같은 매장에서 같은 방법으로 물건을 훔치다 붙잡힌 것으로 드러났다. 면도기 13개를 비롯해 시가 19만6000원 상당의 생필품을 챙겼다. 박씨는 수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미혼인 둘째딸과 단 둘이 살고 있다. 면도기나 면도날을 훔쳐도 쓸 데가 없다. 경찰은 “눈에 잘 띄는 곳에 진열돼 있는 데다 부피가 작아 숨겨 나오기 쉬우니까 훔쳤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박씨를 조사할수록 경찰은 혼란스러워졌다. 박씨는 서울시내 한 부촌에 10억원대 아파트를 자기 명의로 가지고 있었다. 남편이 박씨에게 남긴 재산 가운데 하나였다. 경찰서에 잡혀 온 박씨는 금장 시계와 사파이어 반지를 착용하고 있었다. 이런 장식품 가격은 훔친 물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잠시 후 박씨의 딸이 경찰서에 찾아와 의사 진단서를 내밀었다. 병명은 ‘병적 도벽(절도광)’이었다. 한 대학병원에서 발급한 진단서에는 우울증, 피해의식, 판단력장애 같은 정신질환명이 함께 기록돼 있었다. 이런 증상이 병적 도벽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의사 소견이 덧붙여졌다.
박씨는 절도 19범으로 1975년부터 버릇처럼 물건을 훔쳐 왔다. 젊은 시절 교도소를 수차례 드나들었다. 징역 1년6개월형만 세 번 살았다. 정신질환이 확인되고는 충남 공주 치료감호소에서 1년간 치료도 받았다. 박씨의 딸은 “어머니는 매주 네 번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전문가들은 박씨처럼 생계와 상관없고 자신에게 필요도 없는 물건을 충동적으로 훔치는 성향을 ‘클렙토매니아(Kleptomania)’라고 부른다. 이들은 평소 주변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정서적으로 소외돼 있어 관심을 끌기 위해 범행하는 경향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이웅혁 경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클렙토매니아들은 우울증, 불안, 성격장애 등 각종 정신장애를 앓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이들은 절도 행위를 성취감을 느끼는 수단으로 삼는다”고 말했다.
강창욱 김수현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