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빼놓고 사법개혁 이라니…”

입력 2010-03-18 21:32

대법원이 한나라당 사법제도개선특위의 법원제도개선안을 정면으로 반박함에 따라 지난 1월 이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정치권과 사법부의 갈등이 다시 시작됐다. 올 초 법원의 이른바 ‘좌편향 판결’ 논란으로 촉발됐던 공방이 재연되고 있다.



한나라당의 법원제도개선안에 대한 대법원의 기류는 심상치 않다. 대법관인 박일환 법원행정처장이 한나라당의 개선안을 정면 비판하는 성명서를 18일 이례적으로 직접 낭독한 것은 대법원이 이 문제를 상당히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법원 관계자는 성명 발표 배경에 대해 “대법원장이 별도로 회의한 것은 없고 법원행정처 내부 논의는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용훈 대법원장의 승인 없이 법원행정처장 명의의 성명 발표가 사실상 어려운 점을 감안하면 사법부 최고 수장 역시 이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대법원이 성명을 통해 정치권 주도의 사법제도개선안에 대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부분은 사법부가 배제된 상태에서 관련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법제도는 사법부를 주축으로 정치권과 학계의 의견을 수렴해 손질해 왔는데, 이번처럼 사법부 의견이 반영되지 않고 정치권이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개별사항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 진행 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라며 “삼권분립 대원칙을 훼손하고 각 기관의 자율성을 훼손해 헌법 원칙에 반하는 것 아니냐는 취지”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도 “국회에서 합의되면 사법개혁이 완성되는 게 아니라 사법부가 주체가 되든지 같이 합의해서 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개선안의 세부 내용에 대해선 공식적인 언급을 피했으나 이들 항목 역시 민주주의의 최고 가치인 삼권분립과 사법부 독립을 부정하고 있다는 기류가 강하다. 법관인사위원회에 법무부 장관과 대한변호사협회장 등이 추천하는 인사를 포함시키자는 한나라당의 개선안 내용은 사법권을 침해하는 것이고, 대법원 양형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두자는 방안 역시 위헌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삼권분립에 따라 사법부 구성 및 인사 운영은 사법부 독립의 핵심 전제조건인데 이를 마치 ‘대법원장의 독점적 인사권’으로 보는 정치권의 시각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다.

대법원은 사법제도 개선을 위해 대법원장 자문기구인 사법정책자문위원회가 대안을 마련하고 있는 가운데 정치권이 의견 수렴도 없이 방안을 확정, 발표한 것에 대해서도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대법원은 대법관 증원 대신 하급심을 강화하고 상고를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는데 이런 의견이 일절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그동안 진행된 사법개혁 논의가 미흡했기 때문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 부분은 동의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남혁상 기자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