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조용래] 손글씨
입력 2010-03-18 18:26
누님은 어릴 적부터 글씨 욕심이 많았다. 비쩍 마른 자신의 글꼴이 마음에 안 든다고 늘 불만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취직을 하더니 본격적으로 글씨 교정을 하겠다는 듯 한문붓글씨 학원을 드나들었다.
몇 년을 그렇게 칼을 갈더니 주변에서 시집가는 처자들이 혼수로 장만하는 십장생 병풍 뒤편엔 누님의 붓글씨가 단골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물론 근사하게 표구한 작품도 늘어갔고.
그런데 그의 한글 글씨체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요즘도 가끔 농을 건다. “글씨가 여전히 날렵하네요.” 이순(耳順)이 넘은 누님은 들어가는 소리로 되받는다. “붓과 펜은 다른가봐, 한글서예를 배울 걸….”
당나라 때 관리 등용의 조건은 신언서판(身言書判)이었다. 사람됨을 따지는 데 풍채나 용모, 정연한 언변, 단정한 글씨, 사물에 대한 판단력을 중시했다는 얘기다. 글씨체에 성품이 담겼다는 게 재미있다. 그럼 누님의 노력도 과거시험 때문이었을까.
하긴 차분한 글씨체는 호감을 준다. 또박또박 곱게 쓴 글씨가 담긴 편지는 받는 이를 들뜨게 한다. 거꾸로 괴발개발 쓴 답안지는 그것만으로도 감점 요인이 된다고 교수들은 말한다.
‘자본론’의 저자 카를 마르크스는 워낙 악필이었다. 영국으로 망명해 살길이 막막해지자 취직하려고 애를 썼지만 글씨 때문에 이루지 못했을 정도였다. 아인슈타인, 베토벤 등도 악필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천재는 악필이라는 말도 나오는 모양이나 이는 사실무근이다. 악필 아닌 대가들도 많기 때문이다.
기왕이면 단정한 글씨체를 유지하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악필로 치닫는다. 바쁘게 쫓기며 살기 때문인지 메모를 해도 글씨는 하늘로 날아간다.
나중에 다시 보면 자기가 써놓고도 해독이 안 되는 경우가 흔하다.
요즘엔 글씨 쓸 기회마저 줄고 있다. 이 칼럼 역시 키보드를 두드려 썼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애플사가 1993년 ‘뉴톤’이란 PDA에 문자인식 시스템을 장착한 이래 손 글씨는 귀한 몸이 됐다. PDA의 등장으로 손으로 쓴 글씨조차 곧바로 활자문자로 전환되는 세상이 아닌가.
최근 코펜하겐 미래학 연구소는 머잖아 글을 쓰기 위해 키보드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음성인식 프로그램으로 말이 글로 바뀌는 기술은 이미 개발됐고 상용화는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세상은 이렇듯 빠르게 변하고 있다.
손 글씨가 밀려나는 게 마치 누님의 한숨처럼 들린다. 그래도 따뜻한 햇살 아래 또박또박 쓴 손 글씨로 연서라도 한 통 쓰고 싶은 봄이다.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