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가난한 아이들이 위험하다… 당하고도 못떠난 동네, 가난이 ‘두번째 추행’

입력 2010-03-18 18:14


서울 장위동 초등생 추행사건

은지(가명·9·여)는 2005년 4월 서울 장위동에 왔다. 태어나 쭉 석관동에 살다 처음으로 이사했다. 석관동 집은 보증금 200만원, 월세 30만원. 아빠 병이 깊어 살림을 줄여야 했다. 보증금 200만원을 손에 들고 은지 엄마는 더 싼 집을 찾아 헤맸다.

장위동 셋집은 보증금 없이 매달 35만원만 낸다. 어른이 발뒤꿈치를 들면 안이 들여다보일 듯 야트막한 담과 검은 철제 대문 하나가 집을 지켜주는 전부다. 장위동은 석관동과 큰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그런데도 훨씬 싼 집세만큼 동네는 으스스했다.

뉴타운 지구로 지정

은지네 동네는 2005년 12월 뉴타운 지구로 지정됐다. 재개발 추진위원회가 구성됐다. 사람들이 조합 설립 동의를 받으러 다녔다. “인근에 지하철역 2개, 경전철 건설 예정, 허가만 나면 재산가치 최고!” 부동산업자들 말에 강남 사람들도 집을 사들였다.

하지만 형편이 어려운 원주민들의 반대가 거셌다. 새로 들어설 아파트 입주를 위한 분담금은 그들에겐 ‘부담금’일 뿐이다. 동의율은 70%를 넘지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세월만 흘렀다.

이사 온 지 3년 만에 은지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집에서 15분쯤 걸린다. 학교에 가려면 먼저 차 2대가 엇갈려 지나가기조차 힘든 좁은 골목을 100m쯤 걷는다. 그래도 이 길은 동네에서 대로(大路)에 속한다. 학교로 이어지는 우이천 둑방길에 올라서려면 사람 둘이 나란히 걷기도 버거운 꾸불꾸불한 ‘새끼 골목’을 여럿 지나야 한다. 이런 길은 한낮에도 컴컴하다.

부모는 옆 동네 치킨집에서 일했다. 엄마는 은지를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일하러 갔다. 엄마 아빠가 한창 일하는 오후 2시쯤 수업이 끝나면 은지는 학교 앞 청소년수련관에서 방과 후 수업을 들었다. 아빠가 데리러 오는 시각은 오후 6시. 치킨집 근처 친할머니 집에서 놀다가 엄마 아빠 일이 끝나면 함께 귀가했다. 엄마 아빠는 결혼 15년 만에 가진 딸을 애지중지 키웠다.

맞벌이로 애들만 남아

은지 친구 민희(가명·9·여). 같은 동네에서 자랐고 학교도 같다. 민희 부모도 맞벌이다. 아빠는 택배 트럭을 몰고, 엄마는 작은 회사에서 일한다.

민희는 학원을 여러 곳 다닌다. 벌이가 시원찮아 버거운 일이지만 부모는 어쩔 수 없이 매달 학원 수강증을 끊어준다. 맡길 곳이 없어서다. 민희 여동생(6)은 어린이집에 보낸다. 둘은 학원과 어린이집이 끝나는 오후 5시쯤 귀가해 엄마 아빠를 기다린다.

지난 1월 19일은 방학이라 민희 학원이 일찍 끝났다. 오후 3시, 민희가 은지를 찾아왔다. 은지는 청소년수련관에서 막 영어수업을 끝낸 참이었다.

“우리 집에서 놀자.” 민희가 말했다. 은지는 아빠한테 전화를 걸어 민희 집에 가도 되냐고 물었다. 아빠는 “문 꼭 잠그고 집에서만 놀라”고 당부했다. 3월이면 초등학교 3학년이 되는 은지 민희와 민희 동생, 이렇게 셋이 민희네 집에 모였다.

점점 낙후되는 동네

재개발이 더뎌지면서 동네는 점점 낙후돼갔다. 주민들은 곧 부술 집을 고치지 않았다. 세가 나가지 않아 집을 비워둔 채 이사 가는 사람도 많아졌다. 음침했던 동네가 더 스산해졌다.

동네는 전형적인 재개발 예정지 풍경을 띠기 시작했다. “길 건너 동네와 비교하면 입지조건은 비슷한데 전세금은 2000만∼3000만원씩 싸요. 근데 집값은 더 비싸요. 이게 다 재개발 때문이죠. 주민들이 동의는 안 해주면서 개발되리라 생각해 집은 안 고쳐요.” 부동산업자가 말했다.

좀도둑이 늘었다. 은지네 집에도 도둑이 들었다. 은지의 저금통까지 싹 쓸어갔다. 은지네 집 앞에선 심심치 않게 “소매치기야”라는 소리가 들렸다. 은지 엄마는 그때마다 경찰에 신고했다.

미용실을 운영하는 김모(50·여)씨는 “낮에도 오가는 사람이 없다. 밤 되면 더 무섭다. 안쪽 골목엔 가로등도 없어 더 스산하다. 저녁 8시 이후엔 나도 돌아다니지 않는다”고 했다.

아이들만 있는 집 그곳에서…

오후 4시, 아이들만 있는 민희네 집에 초인종이 울렸다. 남자는 “아빠 친구인데 볼펜 빌리러 왔다”고 했다. 남자는 아이들을 1시간 동안 성추행했다. 어린 아이들은 아무 저항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민희네 집은 둑방길을 따라 가다 ‘사람 둘이 함께 지나기 힘든 새끼 골목’으로 접어드는 입구에 있다. 2층 다세대 주택 지하다. 대문을 닫으면 밖에서 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슬럼화된 동네엔 ‘변태가 산다’는 소문이 돌았다. ‘지나가는 여중생에게 몹쓸 짓을 했다더라’ ‘그 놈을 잡아야 한다’…. 오가는 말만 무성했다. 은지와 민희도 범인으로 그 ‘변태 아저씨’를 지목했다. 경찰이 행적을 쫓고 있지만 남자는 아무 증거도 남기지 않았다.

범인은 며칠 전부터 민희네 집을 노린 듯했다. 집주인 아주머니는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 도둑이 들었다”고 했다. 민희는 전에 안 보이던 담배꽁초가 며칠 전부터 집 앞에 수북했다고 말했다. 먹잇감을 지켜보고, 사전 답사까지 한 뒤 남자는 아이들을 덮쳤다. 전화 받고 달려온 은지 엄마는 통곡을 하다 실신했다.

“이 동네를 떠나고 싶다”

민희네는 서둘러 동네를 떠났다. 하지만 형편이 뻔해 멀리가지 못했다. 민희네가 겨우 둥지를 튼 곳은 큰 길 하나 건너 옆 동네다. 민희 엄마와 아빠는 여전히 일을 나가야 한다. 급한 대로 서로 이해해주는 은지네 집에 저녁 동안만 민희를 맡긴다.

은지 엄마는 그나마 이사라도 간 민희네가 부럽다. 지금 집에서 은지가 학교에 가려면 예전 민희네 집 앞을 지나야 한다. 매일 아침 은지와 함께 그곳을 지날 때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고 엄마는 말했다. 기초생활수급자이면서 빚도 3000만원이나 있는 은지네는 이 동네가 아니면 살 수 있는 곳이 없다.

유일한 희망은 영구임대아파트다. 지난해 10월 신청에선 떨어졌다. 오는 22일이 올해 신청일이다. 가족 수와 연령 등을 점수화해 입주자를 선정한다. 동사무소 담당자는 “70점은 넘어야 하는데 장애인이 없어 커트라인에 못 미친다. 하지만 구청에 사정을 말해보겠다”고 답했다.

사건 이후 은지 엄마와 아빠는 치킨집 일도 접었다. 은지를 옆에서 지켜야겠다는 생각에서다. 당분간 뭘 해야 할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일단 동네를 떠나고 싶어요. 근데 방법이 없어요…. 믿을 건 나라뿐인데….”

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