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진의 이건 뭐야?] 간 보기

입력 2010-03-18 17:54


‘간 보기’라는 단어를 사람에게 쓰는 건 어째 어색하다. 그도 그럴 것이 간 보기 하면 어디까지나 일단 음식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간 본다는 건 그 음식을 배가 불러올 때까지 꿀떡꿀떡 먹어치우는 짓이 아니다. 숟가락으로 아주 살짝 떠서 후루룩, 고작해야 혀만 닿을락 말락하게 맛만 보면 충분하다. 이 ‘간 보기’라는 말이 요즘 유난히 남녀상열지사에 자주 등장한다.

결혼 안 해줄 거면 같이 죽자거나 하는 식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연애는 이미 암모나이트만큼이나 후진 화석이 돼 버린 지 오래다. 요즘 트렌드는 누가 뭐래도 살짝 간을 보는 것, 비슷하게 쓰이는 단어로는 ‘매너남’ ‘낚시’ ‘어장관리’ 등이 있다. 완전히 마음이 있지 않아도 일단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하기 때문에 점심 때면 어김없이 ‘식사는 하셨어요^^?’ 같은 문자를 날리는 매너남들. 여러 마리의 고기를 어장에 풀어 놓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영리한 남녀들은 찌에서 소식이 오나 보면서 낚고 낚인다.

상사가 퇴근하거나 말거나 업무 시간이 끝나면 “전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는 말과 함께 쿨하게 사라지는 요즘 세대는 영악하고 현명하다. 옛날처럼 온몸이 가루가 되도록 충성을 바친다고 해서 회사가 몇 십 년을 책임져 주는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 삶을 제 맘대로 충실하게 사는 게 더 중하다. 이런 영악스러움이 간 보기 전문가들을 점점 더 대량 양산한다.

사랑만 갖고 사랑이 되냐며 자신이 갖고 있는 육체 자본, 지식 자본을 비롯한 기타 등등의 ‘스펙’으로 현재 내가 고를 수 있는 최상의 카드를 골라 남는 장사를 하고 싶은 것이 이 ‘간잽이’들의 솔직한 마음이다. 게다가 베스트셀러 ‘시크릿’ 류의 책을 열심히 읽으며 ‘믿는 대로 될지어다. 아자아자 파이팅’ 하고 주문을 외우는 이들은 아직 이뤄지지 않은 자신의 가능성도 이미 자신이 지니고 있는 조건으로 친다. 지금 내가 취업준비생일지언정 장차 대기업 사원이 될 것이고, 지금 내가 중소기업 사원일지언정 멋지게 이직에 성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 가지려고 안달복달하는 2010년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비밀스럽게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사람이 아니다”라며 유예된 미래도 살짝 당겨 와서 거래에 동원한다.

사실은 우리가 모두 다 겁쟁이여서 그렇다. 손해 보며 살 자신도 없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들이댔다가 무안당할 자신도 없고, 조건 같은 것 안 보고 사랑만 찾다가 똑똑하게 잘 먹고 잘 사는 다른 사람 부러워하지 않고 꿋꿋할 자신도 없고, 그러다 보니 자꾸 간만 본다. 연애 관계든 직장 문제든 죽어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따지면서 간 보는 데 점점 익숙해지면서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정작 끼니 때가 되어도 먹을 생각을 못하고 자꾸 간만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 이제 됐거니’ 생각하고 맘 편히 먹지를 못하고 ‘됐나, 아직 아닌가’ 하고 자꾸 간만 보게 되는 것이 간 보기의 가장 큰 부작용이다. 좀 먹고 살자.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