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로 한국인 姓 붙인 혜성 ‘이-스완’ 발견, 이대암 영월곤충박물관장

입력 2010-03-18 18:01


미국의 여행 작가 빌 브라이슨은 “과거를 보려면 하늘을 보라”고 했다. 1억 광년 전 우주 반대편을 출발한 별 하나가 지구 위 반짝이는 눈동자 한 쌍을 만난다. 과거와 현재의 조우, 그건 기적이라 할 만하지 않는가. 혹은 우주적 서커스라면 어떤가. 팽창하는 우주의 소멸하는 시공간이 공중그네에서 손을 스치는 찰나의 곡예. 1년 전 강원도 산골에서 일어난 건 이를테면 그런 우주적 사건일 수 있겠다.

지난해 3월 27일 오전 5시(세계시 기준 3월 27.85일) 영월군 북면 한 건물 옥상에서 디지털 카메라 한 대가 ‘찰칵’했다. 이때 찍은 사진 속에 한국인의 성을 딴 최초의 혜성 ‘이-스완(YI-SWAN)’이 숨어 있었다. 발견자는 아마추어 천문가 이대암(54) 영월곤충박물관장이었다.

건축학 박사, 대학 교수, 곤충 수집가, 박물관장, 구름 전문가, 그리고 아마추어 천문학자. 도대체 명함 하나로는 요약이 불가능한 그의 자칭 ‘천방지축 이력’에도 일관된 목표는 있었다. 중학교 시절 시립도서관의 천문학 도서에서 별을 처음 접한 뒤 그에게는 내내 한 가지가 숙제였다. 새 천체를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는 40년 만에 마침내 초록 혜성을 만났다.

2007년 2월부터 지난해 3월까지 2년간 2000여 시간. 이 관장이 ‘이-스완’을 발견하기 위해 관측에 쏟은 시간이다. 구름이 껴도, 달이 밝아도 별보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어쩌다 맑은 날이 이어지면 그는 “고3 수험생처럼 세수하고 눈비비어 가며 하루 6∼10시간씩 별만 보며 날밤을 샜다”고 했다.

이 관장은 매일 밤 은하수 사진 40여장을 찍어 좌우 모니터에 띄워놓고 새 혜성을 찾았다. 망원 카메라로 찍은 밤하늘은 바늘 하나 찌를 자리 없이 빽빽하다. 그중 새로운 점 하나를 발견하는 건 이 관장의 표현에 따르자면 “모래사장에서 새 모래알을 찾거나 태평양에서 바늘 하나 건지는 일”이라고 했다. 그걸 한국인 최초로 해냈는데 지난 1년간 한국 천문학계 반응은 싸늘했다.

첫 혜성 발견자가 된 뒤 그는 국제천문연맹(IAU)이 혜성 발견자에게 주는 애드거 윌슨상을, 일본 동아천문학회의 ‘신(新)천체발견상’을 받았다. 일본에서는 축하 메일이 쏟아졌다. 한국에서 받은 축하는 한국아마추어천문동호회연합회장 명의로 배달된 ‘축 한국 최초 혜성 발견’이란 화환 하나가 전부였다. 그는 “그동안 알고 지내던 한국 천문학자들로부터 축하 전화 한 통 받지 못했다. 아무도 아는 척하지 않더라”며 서운해 했다.

한·일 차이가 반응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건 천문학의 역사이자 아마추어 천문가 숫자(일본 10만명, 한국 200여명)의 차이이기도 했다. 사실 ‘한국인 최초 혜성 발견’은 일본 학자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간 이 관장은 새 혜성을 발견했다고 생각될 때마다 야마오카 히토시(山岡均) 규슈대 천문학과 교수에게 메일을 보내곤 했다. 지난 몇 년간 그가 야마오카 교수에게 보낸 혜성 발견 메일은 수십 통. ‘이-스완’을 발견한 날도 이 관장은 확인을 부탁한다는 메일을 보내 “혜성이 아니다”는 답을 받았다. 반전은 일주일 후 일어났다. 궤도를 따라 이동하던 이 혜성이 태양관측인공위성(SOHO) 카메라 ‘스완’에 포착돼 ‘2009 F6’이란 이름으로 세계 천문 소식지 ‘서큘러(Circular)’에 소개된 것이다. 소식지를 본 야마오카 교수는 궤도 계산을 통해 ‘2009 F6’이 이 관장이 발견한 혜성과 동일체란 걸 확인했다. 야마오카 교수는 이 사실을 IAU에 보고했다. 그의 발견은 4월 2일 공인받았다.

“소식지는 천문학자들만 받아보는 것이어서 나는 그런 혜성이 발견됐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어요. 야마오카 교수가 내 사연을 (IAU에) 보고할 의무 같은 건 없습니다. 그건 국경을 초월한 유대, 일종의 과학자 정신이었어요.”

아주대 홍익대를 거쳐 호주 시드니대학에서 건축학 박사학위를 딴 이 관장은 해외 건설현장을 누빈 건축 전문가다. 돈도, 지위도 부족하지 않던 그가 1995년 강원도 영월군 세경대학에 손들고 자원해 들어갔다. 도심이나 다른 시골에 비해 밤이 어두워 별 관측이 쉽다는 이유였다. 2002년에는 폐교를 개조해 영월곤충박물관을 만들더니, 낮엔 강의하고 밤엔 별보고, 방학 때엔 벌레를 쫓아다니는 기이한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그 시절에는 커다란 사탕 세 개를 물고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무엇인가는 뱉어내야 했다. 고민 끝에 그가 버린 건 별도, 곤충도 아니었다. 건축과 교수직이었다. 남들 보기에는 “낙하산 없이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무모한 짓”으로 보였겠지만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제 인생을 요약하면 ‘천밤지충’이에요. 밤에는 하늘 보고 낮에는 땅에서 곤충 보는 삶인 거죠.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내게는 김정호(조선 시대 지리학자)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이탈리아 예술가이자 과학자)의 피가 함께 흐르는 모양입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국내외 곤충 2000점과 수장고(收藏庫) 보관 곤충 2000점 등 총 4000여점 표본은 모두 이 관장이 30여년간 직접 채집하고 제작한 것이다. 그의 말처럼 표본은 그가 투자한 시간이자 인생이었다.

건축가로 싱가포르 해외 건설현장에 근무할 때는 말레이시아 정글에서 버드윙나비를 잡으려다 폭포에서 떨어질 뻔하기도 했다. 곤충에 빠진 계기는 나비였다. 대학 시절 건널목에서 그를 쫓아온 검은 제비나비 한 마리를 잡은 게 인연이 됐다. 책을 뒤지고 곤충학자를 찾아다니면서 아마추어 곤충 채집가가 됐다. 지난해 1월에는 러시아과학원과 함께 ‘한·러 장수하늘소 공동복원연구소’를 영월곤충박물관에 개설해 인공증식 작업을 하고 있다. 성공하면 장수하늘소 생태 연구에 획기적 전기가 마련될 전망이다.

별과 곤충이 본업이라면 부업은 셀 수도 없다. 2005년에는 앞서 15년간 찍은 구름 사진 2000장을 모아 ‘구름 쉽게 찾기’라는 국내 최초의 구름도감을 만들었다. 렌즈에 빠져 제2차 세계대전 전투기 항공렌즈와 인쇄기 렌즈, TV 카메라 렌즈까지 렌즈만 수십 종을 수집하기도 했다. 전통악기 제작 취미도 갖고 있다. 요즘에는 연주자들의 악기 설계 의뢰를 받고 고민하고 있다.

“혜성을 발견한 순간 ‘인생의 숙제 하나를 해결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꿈을 이뤘으니 나머지 생은 여벌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은 그런데 벌써 다음 목표가 줄을 서 있다. 지난해 4월부터는 신성(노바:폭발로 갑자기 수천∼수만 배 밝아지는 별)과 초신성(슈퍼노바:외계은하에서 발견되는 신성보다 더 밝아지는 별)을 찾고 있다. 두 번째 혜성 찾기에도 돌입했다. 지난 1년간 관측 시간이 벌써 1500시간을 넘어섰다.

하늘에 인생을 걸었지만 설혹 신성을 찾지 못한다 해도 억울할 건 없다. “2000억 광년 전 혹은 1억 광년 전에 출발한 빛이 시공을 초월해 지금 내 눈과 만나는 겁니다. 그 순간만큼은 지구의 어떤 것도 무의미해지죠. 순수하게 우주와 대화하는 것입니다.”

영월=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