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규환 (7) 거친 아이들 교화 위해 밴드부·4H클럽 등 조직

입력 2010-03-18 17:23


전후 거리의 고아들은 남자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여자 아이들은 남의 집 더부살이로 들어가 식모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연스레 눈에 많이 띄는 남자 아이들을 먼저 수용하게 됐다. 1961년 5월 10일 은평천사원은 남자시설로 정부 인가를 받았다.

힘들었던 것은, 아이들이 이미 거리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는 점이었다. 아이들 성정이 대부분 거칠었다. 아무 때나 저 좋은 시간에 잠들고 일어나는 생활을 반복한 이들에게, 정해진 규칙이 있는 단체 생활은 쉽게 적응하기 힘든 것이었다. 통제받기를 싫어해서 차라리 밖에서 매를 맞더라도 동냥이나 소매치기의 삶을 택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러나 일단 천사원에 들어왔으면 정해진 규칙을 지켜야 했다.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에게 나는 이따금씩 야구 방망이를 들었다. 나에게 야단을 들은 아이들 열댓 명이 집단가출을 감행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또 이들을 찾으러 거리로 나갔다. 지난한 일의 연속이었다.

하루는 서대문경찰서의 도움을 받아 경찰 몇 명과 함께 서울역 앞으로 나갔다. 지금 대우빌딩이 있는 자리가 당시는 ‘거지 소굴’이었다. 큰 정자가 하나 서 있었는데 그 아래 위로 거지와 넝마주이들이 비바람을 피해 생활하고 있었다. 그 중 나이 지긋한 한 사람이 왕초 노릇을 했다. 그가 웃옷을 벗고 드러누우면 꾀죄죄한 아이들이 앞 다투어 안마를 하거나 시중을 들었다. 우리가 아이들을 시설로 데려가겠다고 해봤자 왕초가 애들을 내놓을 리 만무했다. 경찰의 도움을 받아 아이 몇몇을 천사원으로 데려와도 어느 틈엔가 이들은 시설을 빠져나갔다. 왕초 일행이 와서 몰래 아이들을 빼가는 일도 많았다. 어떤 아이는 그렇게 열여섯 번을 데려오기도 했다.

어느 날 담당 간호사가 급히 나를 찾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 애가 저한테 모르핀을 놔 달라고 졸라요. 어떡해요?”

열다섯 살 정도 됐음직한 소년이었다. 옷을 벗겨봤더니 팔과 다리, 손과 발에까지 주삿바늘 자국이 가득했다. 아편 주사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역 앞 왕초가 자꾸 소매치기와 도둑질을 시키자 반항심에 도망쳐 온 아이였다. 그는 아편 후유증으로 몹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나는 먼저 아이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자신이 빠진 수렁에서 빨리 헤어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서울시의 도움을 받아 시립정신병원에 아이를 입원시켰고, 그 아이는 1년 뒤 완치돼 퇴원을 했다. 그리고는 이발 기술을 배워 취업하는 등 사회에 적응해 나갔다.

시설의 아동들은 대부분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하루 아침에 부모와 떨어져 고아가 된 아이들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이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되찾아주기 위해서는 어디 한 군데 열중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 개발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가출을 쉽게 생각하고 시설 드나들기를 반복하는 생활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했다. 이를 위해 아이들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취미를 갖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천사원 내 소년밴드부를 조직하고, 4-H클럽과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시작했다. 내가 먼저 보이스카우트 소년단 지도자 훈련을 받아 대장이 됐고, 곧 4-H클럽 지도자 자격도 획득했다.

정리=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