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C 이념전쟁 책을 죽이다!… ‘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

입력 2010-03-18 17:40


레베카 크누스/알마/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은 벨기에 루뱅에 있는 유서 깊은 대학 도서관에 불을 질렀다. 이로 인해 중세 필사본 750권, 인큐내뷸러(1501년 이전에 인쇄된 책) 1000권 이상을 포함해 23만 권의 귀중한 책들이 잿더미로 사라졌다. 나치 독일은 유대인 학살과 함께 그들의 도서관도 파괴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1000권이 넘는 장서를 가진 469개 도서관 대부분을 파괴했고, 600만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학살했다. 독일은 폴란드에서도 학교와 공공도서관 장서의 90%, 전문적인 장서와 개인 장서의 70%, 과학 책 장서의 55%가량을 훼손시켰다. 2차세계대전으로 폴란드 도서관에 있던 2250만권 가운데 1500만권이 사라진 것이다.

미국 하와이 대학 문헌정보학과 레베카 크누스 교수는 책의 학살이 제노사이드(genocide·인종말살)와 에스노사이드(ethnocide·문화말살)를 일으키는 동일한 힘과 메커니즘에 의해 벌어지고 있음을 20세기에 일어난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진시황의 분서갱유처럼 책을 통해 인간 정신을 파괴하는 행위는 고대부터 늘 존재했으나 20세기 들어 이념 전쟁이 벌어지면서 국가나 사회가 다른 집단의 정신을 죽이려는 의도로 조직적으로 방대한 분량의 책을 없애버린 것은 하나의 ‘학살’이라는 뜻에서다.

나치가 유럽에서, 세르비아가 보스니아에서, 이라크가 쿠웨이트에서, 중국의 마오주의자들이 문화혁명기에 자국에서, 중국공산당이 티베트에서 자행한 책과 도서관의 파괴는 침략과 전쟁의 역사에 연동돼 있다. 저자는 도서관 파괴를 “그 집단의 문화 발달을 총체적으로 방해하고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자기 존중감을 훼손하는 일”라고 규정한다. 정권은 지배 이념을 내세워 권력을 잡으면, 권력의 밑바탕이 되는 이념의 정통성을 찾으려 하고 그 집단이 원래 지닌 정체성을 지배 담론에 맞춰 재편하려 한다. 책과 도서관은 대개 휴머니즘과 다원주의와 관련한 메시지를 듬뿍 담아 사람들에게 전하려 하기 마련이므로, 극단주의적 정부는 도서관을 반대세력의 상징으로 여기고 완전히 통제하고 검열하며 ‘숙청’까지 한다는 게 저자의 이론이다.

중국은 좌익과 우익 양쪽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책의 학살을 경험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중국을 정복하려는 과정에서 2000개가 넘는 도서관에서 1000만권 가량을 훼손했다. 1966년부터 대륙을 광기로 몰아간 문화혁명도 책의 대량파괴를 몰고 왔다. 공산주의가 아닌 사상과 학문을 다룬 책들에 대한 파괴행위가 홍위병들을 중심으로 도처에서 벌어졌다. 1990년대 초 크로아티아에서도 책의 대학살이 자행됐다.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로비아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가 주도하는 연방군은 크로아티아의 고대 항구도시 등을 폭격했다. 이로 인해 60만 권의 책과 정기간행물 5566종, 인큐내뷸러 33권, 필사본 1080권, 양피지로 만든 책 370권, 희귀본 1350권, 지도 1200개 등이 피해를 입었다.

문명화된 20세기에 이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벌어진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저자는 극단적인 정권들이 자기들의 이념이나 신념과 다른, 혹은 그 신념을 위한 유토피아 건설에 방해가 되는 사상을 없애려 했고, 그 방법이 바로 책의 학살이라고 말한다. 책의 파괴에 나선 이들은 글로 쓰여진 자료를 적의 사상을 대변하는 무기로 보거나 적 그 자체라고 합리화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책의 학살은 인종말살과 문화말살이라는 틀 안에서 일어난 종속적인 현상 또는 부차적인 형태”라고 말한다. 인종혐오를 부추기고, 인종학살에 나선 집단은 희생자들의 문화가 구체적으로 표현된 책과 도서관에 대한 파괴도 당연시 한다는 것이다. 도서관이 파괴되면 문화유산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도서관이 정체성을 증명해 준 집단도 자존심에 타격을 입고 고통을 겪게 된다. 도서관은 문화의 저장고이면서 활동무대로서 현재와 미래를 잇는 세포 조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을 불태우는 것은 진실, 아름다움, 진보라는 목표, 문명 그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라면서 “세계 도서관들을 보존하는 것은 인류의 위대함을 증언할 목격자를 보존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창래 옮김. 2만6000원.

라동철 기자 rd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