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정원교] “내 아이가 당하지는 않았지만…”

입력 2010-03-17 17:57


“건전한 공동체 회복이 절실하다. 이대론 모두가 성범죄 방조자이자 피해자 꼴”

김길태가 이른 새벽 여중생 이 모양 시신을 물탱크에 버리던 장면을 지켜본 여성은 선뜻 신고할 수 없었다고 했다. 혹시 해코지라도 한다면? 꺼림칙한 생각이 뒷골을 무겁게 했을 것이다. 그것도 성폭행과 살인을 저지른 흉악범 아닌가. 미혼 여성으로선 부담이 됐을 만도 하다. 목격자나 증인을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가 부족한 탓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양 어머니는 여전히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고통스러워하고 있단다. 하기야 그게 그렇게 쉽게 아물 상처이겠는가. “이렇게 사람을 미워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짐승만도 못한 짓을….” 이양 어머니가 한 신문 인터뷰에서 말을 잇지 못했다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다. 이양은 갖고 싶은 게 많았지만 늘 “나중에 돈 생기면 사 달라”고 했다니 엄마 마음이 얼마나 찢어질까. 그러면서도 그가 잊지 않고 한 말은 이렇다. “사건이 터지면 분노가 들끓고 좀 지나면 바로 식어 버리잖아요.”

김길태가 뉴스의 인물로 등장한 뒤 그가 왜 그렇게 됐는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남성적이고 활달하며 맡은 일을 잘 처리한다.”(중1 생활기록부) “작은 잘못에도 엉뚱한 거짓말을 하거나 변명을 하곤 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거짓말쟁이로 알려져 따돌림 당했다.”(중3 담임) “잦은 수감생활을 하다 보니 사회화 과정이 부족한 것 같다. 그는 사이코패스는 아니다.”(프로파일러 권일용 경위)

그가 어릴 때부터 문제아는 아니었던 게 분명해 보인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는 중1 때 출생의 비밀을 알게 돼 무척 괴로웠다고 말했다. 그가 막노동하는 부모가 아닌 여유 있는 가정에서 자랐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본다. 방황할 때 바로잡아 주는 선생님이라도 있었더라면? “김씨 역시 불행한 인생을 산 것 같다.” 신분을 밝히지 않은 한 시민은 이렇게 말하며 그를 위해 변호사 비용을 댔다.

법무부 장관은 1997년 이후 중단돼 온 사형 집행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보호감호제 재도입을 담은 형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할 계획도 밝혔다. 전자발찌 제도와 성범죄자 신상 공개를 보완하겠다는 움직임도 있다. 아동 상대 성폭력 사건에 대한 ‘무관용 원칙’에다 성범죄자 교화 프로그램 재검토에 이르기까지….

쏟아지는 대책들이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것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반인륜적인 성범죄가 활개치지 못하도록 이제라도 시스템을 촘촘히 구축하겠다는데 백번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경찰을 빼놓고 얘기한다면 공허하다. 그들은 성범죄가 접수되면 초동 단계에서 내 일처럼 뛰지 않는다. 그러니 강간 사건 미검거 비율이 10%를 넘는다. 성범죄 미결(未決) 건수가 많은 경찰서에 불이익 주는 대책은 왜 안 세우는지 모르겠다. 대통령이 한 마디 해야 뒤늦게 기를 쓰고 달려드는 그들 아니던가.

세상 부모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아이만은 온전하게 자라길 바란다. 그들은 이 같은 방안들이 시행되면 과연 인면수심의 성범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할까. 어리석은 질문이겠다. 위에서 말한 제도적 장치만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제 ‘내 아이만 당하지 않으면’이라는 생각부터 바꿔야 한다. 모두가 ‘내 아이가 당하지는 않았지만’이라면서 나서야 한다.

사람들은 나 자신만 지키겠다고 하다간 아무도 지킬 수 없게 된다는 역설을 쉬 잊어버린다. 우리 어릴 때만 해도 마을 공동체는 곧 교육의 장(場)이었다. 내 아이 남의 아이 할 것 없이 선도하고 훈계했다. 동네에서 담배 피우는 미성년 학생들을 못 본 척하는 상황을 상상이라도 했던가. 김길태에게 아무도 따뜻한 관심을 보이지 않은 화(禍)는 결국 우리 사회로 돌아왔다.

건전한 공동체를 회복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공동체를 함께 가꿔가는 역할은 우선 어른들이 떠맡아야 한다. 때로는 교육자로, 때로는 감시자로. 직접 피해자가 아니라고 성범죄자를 모른 척하는 것도 그들로 하여금 더욱 기승을 부리게 할 뿐이다. 이대로는 우리 모두가 성범죄 방조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정원교 카피리더 wkch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