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신의 깜짝 한수] 비씨카드배 64강전 ● 주위엔하오 3단 ○ 콩지에 9단
입력 2010-03-17 18:04
잊혀졌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불쑥 눈앞에 나타나 마치 처음 만나는 인연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서랍 안에서도, 전혀 뜻하지 않던 대화 속에서도, 주변 일상 어느 곳에서든 나타난다. 3월, 어느 나뭇가지에 살며시 솟아 나온 여린 새싹을 보니 자고 있던 감정이 샘솟듯 생명감이 느껴진다.
연구실에 들르니 정관장배 4연승으로 수문장 역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박지은 9단이 기보 뭉치 옆에서 활짝 웃으며 반갑게 맞아준다. 박 9단은 그동안 못 본 기보가 100판도 넘는다고 엄살을 부리며 어서 다 봐야겠다고 기보를 놓아보고 있었다.
그 앞에 앉아 밀린 얘기들을 하며 기보를 놓아보는데 어느 부분에서 갑자기 판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아! 이 수가 있구나”라고 소리친다. 덩달아 판을 바라보니 정말 좋은 수다. 역시 천리마를 보고도 보통 사람이 볼 때는 여느 말과 다름을 못 알아채건만 이 정상급 기사들의 보는 눈은 직접 두는 수만큼 예리하다.
이 수가 나온 바둑은 비씨카드배 64강전 콩지에 9단과 주위엔하오 3단의 대국. 초반 유행을 타지 않는 포석과 좋은 수읽기 수순을 보여주는 바둑으로 흘러가다가 한차례 반상에 지진이 인다. 한 수 한 수 누군가 실수를 하면 바로 끝이 나는 결정적인 모양이 나왔다. 이 때 두어진 실전의 백1! 이 가만히 빠진 수가 좋은 수였다. 얽혀져 있는 흑과 백의 수상전의 급소자리는 실전 a의 곳인데 그렇다고 참고도 흑1로 바로 파호를 하면 백2라는 수가 준비되어 있다. 이 수를 방비하기 위해 참고도 흑a로 막으면 백1로 두어 한수 차이로 백승의 수상전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흑은 실전 흑2로 두었지만 백3의 교환 후 백5로 두어 우변 흑이 다 죽어 승부는 결정되고 말았다. 분명히 이 수를 다 읽어 놓고 이런 진행을 결행했을 콩지에 9단의 수 읽는 능력은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이 후 흑은 몇 차례 강한 승부수를 날리며 백을 위협해봤지만 백의 알기 쉬운 마무리 작업으로 백승. 얼마 전 이창호 9단에게 승리하며 세계대회 우승도 거머쥔 콩지에 9단의 실력은 아무리 봐도 최전성기인 듯싶다. 인터뷰 기사를 보니 명절 연휴에도 쉬지 않고 혹독한 훈련을 했다고 한다. 역시 검이란 내버려 두면 녹이 슬고 먼지가 쌓이는 법이지만 매일 갈고 닦으면 명검이 되는가 보다. 누구나 지니고 있을 모양도 종류도 각양각색일 이 검. 독자 여러분 모두가 봄날의 햇살처럼 반짝이는 눈부신 명검을 품고 사는 인생이길 바란다.
<프로 4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