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경제위기속 ‘외국인 혐오증’ 기승
입력 2010-03-16 19:18
고대 그리스는 ‘제노포비어(xenophobia·외국인 혐오증)’라는 단어를 창조했다. 현대 그리스는 제노포비어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이민자인 하마드 아미리(22)는 며칠 전 그리스 수도 아테네에 있는 형의 휴대전화 가게에 일하러 갔다. 그러나 가게 외벽엔 “외국인들은 물러가라”는 노란색 페인트로 휘갈겨 쓴 낙서가 빼곡했다. 극렬 민족주의자 단체인 ‘골든 돈’의 휘장과 함께였다. 결국 그는 가게 문을 열지 못했다. 몇 달 전엔 이 단체 회원들이 들이닥쳐 “가게 문을 닫지 않으면 모든 물건을 박살내겠다”고 위협했다. 아미리는 “극소수인 우리가 과연 그리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라고 흐느꼈다.
그리스가 경제위기에 빠지면서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은 더욱 확산되고 있다. 극렬 민족주의자뿐 아니라 중산층마저 반(反)이민 정서에 휩쓸리고 있다고 LA타임스(LAT)가 16일 보도했다.
과거 ‘반이민 정서’는 종교적 이유가 강했지만 지금은 경제적 이유다. 이민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다는 위기감이 때문이다. 불법 이민자들의 범죄 행위 증가도 한몫을 한다. 지난해 현지 언론의 여론조사 결과 그리스인 10명 중 9명은 “더 이상 이민자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답했다.
20년 전만 해도 그리스는 동일한 언어와 종교, 문화를 가진 단일민족으로 구성됐다. 지금은 상황이 크게 바뀌어 인구 1100만명 중 10.1%가 이민자들이다. 1990년대 초반엔 정치적 망명을 택한 알바니아계 이민자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최근엔 전쟁을 피해 들어온 이라크·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계 이민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리스 정부는 최근 이민자들의 자녀가 몇 년간 그리스에서 학교를 다녔을 경우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추진하려 했다. 극렬 민족주의자들은 물론 야당까지 반대하고 나섰다. 80만명이나 혜택 받는 마당에 시민권을 무료로 줄 수 없다는 것이다.
9세 때 알바니아에서 그리스로 온 뒤 그래픽 디자이너가 된 엠마누엘라 라포시(27·여)는 “나는 그리스를 느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는 나를 외국인으로 취급한다”고 말했다.
아테네에선 불법 이민자들과 극렬 민족주의자들 간 싸움이 연일 벌어지고 있다. 2년 전 경찰 발포로 10대 이민 소년이 사망하면서 큰 사회혼란을 겪었던 그리스가 또다시 이민으로 인한 ‘위기’를 맞고 있다.
김영석 기자 y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