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흥우] 막 내린 총재시대
입력 2010-03-16 18:37
체면을 중시하는 유교 문화권 국가에선 비슷한 역할과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라도 다양한 호칭으로 불린다. 영어로는 모두 ‘president’로 번역되지만 우리는 대통령, 총재, 회장, 의장, 사장, 총장, 학장 등의 직함으로 구분한다. 엄격한 신분질서를 유지했던 유교문화의 잔재로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권위주의와 우월의식 때문에 호칭이 세분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같은 은행의 장(長)인데도 행장이라고 하는 은행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은행은 총재라고 불렀다. 얼마 전까지 산업은행장의 공식 직함은 산업은행 총재였다. 같은 총재급이라는 이유로 한국은행 총재가 주최하는 금융협의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런 산업은행을 마뜩잖게 여겼다. 국회의원이던 1995년 산업은행 총재 명칭 변경을 권유했다가 은행 측으로부터 “대외신용상 총재라는 명칭이 좋다”는 핀잔을 들었다.
대통령이 된 뒤 다시 칼을 빼들었다. 취임 직후인 2008년 3월 금융위원회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산업은행은 현재 일반은행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면서 여전히 은행장 명칭을 총재로 쓰고 있다”면서 “과거사회의 뿌리 깊은 권위의식을 버려야 한다”고 질타했다. 이후 산업은행은 ‘총재’를 ‘행장’으로 바꿨고, 금융협의회에도 꼬박꼬박 참석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금융권에선 한국은행만 총재로 부르고 있다.
총재 직함은 1910년대 후반부터 사용된 듯 보인다. 1919년 3·1운동 직후 서울에서 조직된 한성임시정부가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집정관 총재’로 선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승만이 5개월 만에 대통령으로 바꾸긴 했지만. 이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정당 당수는 어김없이 총재로 불렸다. 권한 또한 막강했다. 공천을 포함한 모든 당무를 관장해 총재 앞엔 늘 ‘제왕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21세기 들어 권위주의 청산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정당의 총재시대는 서서히 종언을 고한다. 민주당의 경우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이 총재직을 사퇴하면서 없어졌고, 한나라당은 이듬해 총재직을 없앴다. 대표최고위원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자유선진당 총재직이 오늘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자유선진당은 전당대회를 열어 당수의 명칭을 총재에서 대표로 변경하고, 대표 체제로 전환한다. ‘이회창 총재’가 ‘이회창 대표’가 됨으로써 주요 정당의 총재시대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됐다. 하지만 당수 명칭 하나 바꾼다고 당 체질까지 하루 아침에 바뀔지는 미지수다.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