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혜경] 밥그릇과 항아리

입력 2010-03-16 17:56


무심코 찬장 문을 열어보다가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릇 하나를 발견하였다. 수년 전 저소득층 아이들과 함께 한 캠프의 도자기 만들기 프로그램에서 빚은 식기였다. 모양은 시원찮아도 소박한 추억을 간직한 채 다른 그릇들과 나란히 있는 폼이 대견스러웠다.

그때 아이들은 도자기 만드는 방법을 듣고도 선뜻 나서지 못하다가, 하나 둘 자기들만의 작품을 꼬물꼬물 만들어 나갔던 기억이 있다. 엄마에게 선물을 할 거라며 행복한 얼굴로 말하는 아이는 나처럼 밥그릇을 만들었고, 자기가 무얼 만드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아이는 정체 모를 항아리를 만들었다. 나머지 아이들은 다른 친구들이 만드는 것을 곁눈질하다가 머그 컵을 만들었다.

나도 어떤 것을 만들까 고민하다가, 뚜껑이 있는 미니 항아리를 머릿속에 스케치하고는 아이들을 챙겨가면서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당시 내가 생각했던 그림은 역사책에 나올 법한 좌우대칭의 매끈한 미니 백자였는데,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아이들을 인솔하느라 작품을 만들 시간이 없었다는 핑계로 투박하기 그지없는 ‘펑퍼짐한 밥그릇’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나름의 노력이 들어갔기 때문인지, 그 그릇은 은근한 매력으로 한동안 내 밥그릇 노릇을 톡톡히 해낸 나만의 작품이었다.

우리의 삶도 이 그릇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 목표를 정하고 그것의 성취를 위해 노력하지만 예상치 못한 난관을 만나는 일이 종종 있다. 이때 사람들은 멀리 돌아가기도 하고, 상황에 맞도록 목표를 수정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목표를 발견하기도 한다.

내가 만약 그때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미니 백자를 만들었다면, 그것을 장식장 안에 넣어 놓고는 눈으로 즐기는 데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바쁜 와중에 급하게 빚은 밥그릇은 밥상에 오르는 실용성으로 인해 더 큰 만족을 주었고, 아이들의 모습까지 생각해 낼 수 있는 도구가 됐으니 또 다른 성취가 아닐 수 없다.

얼마 전에 TV에서 가수 인순이씨가 인터뷰한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어려운 시절에 돈을 벌기 위해 클럽에서 노래를 하기 시작했고, 노래를 시작했더니 인생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처음에는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그 안에서 자기만의 재능과 끼,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꿈을 설계하고, 그것을 위해 땀 흘리며 노력하였더니 카네기홀이라는 세계적인 무대에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삶은 인간 승리의 드라마지만 상황을 거스르지 않고 물처럼 유연하게 환경을 잘 이용한 것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삶을 물에 비유하는 것 같다.

물처럼 흘러가다 보면, 내 그림자 뒤로 멋진 강 길이 만들어지고 어느새 바다로 나와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상선약수(上善若水)의 경지는 그래서 가장 위대한 경지로 일컬어지는가 보다.

이혜경 한국아동복지협회기획홍보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