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규환 (5) 아펜젤러 할머님 통해 ‘후원자 개발’ 원리 터득
입력 2010-03-16 17:36
아펜젤러 할머님 집 테이블 위에는 편지지와 편지봉투가 항상 가득 쌓여 있었다.
“아니, 무슨 편지를 이렇게 많이 쓰시는 거예요? 다 어디로 보내시는 거죠?”
어느 날 내가 묻자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나는 요즘 먹고 자고 기도하는 시간 외에는 이렇게 편지 쓰는 일에 모든 시간을 쓰고 있다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할머님은 다시 설명하셨다.
“이게 다 은평천사원을 위한 일이야. 내가 아는 모든 곳,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서 한국 고아들의 실상을 알리고 이들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거지. 그래야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거든. 이게 내가 천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이네.”
아펜젤러 할머님은 이렇게 일일이 편지를 보내 후원금을 모으셨다.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할머님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도움을 주고 싶어도 사람들이 실상을 알지 못한다면 관심을 갖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님은 내 눈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야. 왜 그런지 아나? 지금은 그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지? 하지만 아이들만 잘 자라준다면 장차 그것보다 더 확실한 투자는 없다네. 그러니까 지금 뭐든지 아낌없이 지원하고 베풀어야 하는 거야.”
당시 나는 그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자랑스러운 천사원 출신들을 볼 때마다 그 말의 뜻을 분명히 알게 됐다. 이들은 해마다 많은 기부금을 내놓으며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과거 자신들과 같은 처지의 후배들을 도우려는 마음을 늘 간직하고 있다.
나는 아펜젤러 할머님을 통해 천사원의 후원자 개발을 위한 중요한 원리를 터득했다. ‘편지 쓰는 것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 내가 아는 모든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받는 것이 끝이 아니라 받은 것으로 정확하게 무엇을 했는지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의 중요함을 말이다. 후원금으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물질적 정신적인 혜택을 보았는지를 소상히 알린다. 그리고 후원자들의 마음에도 그만한 기쁨과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이다.
아펜젤러 할머님은 은퇴 후 1966년 미국으로 떠나 여생을 보냈다. 그러나 이후로도 매월 후원금을 보내는 등 천사원을 후원하는 일만큼은 언제나 현역이었다.
79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할머님을 다시 만났다. 85세로 작은 아파트에 혼자 살던 할머님은 연신 “잘 왔다! 잘 왔다!”며 양 볼에 키스해 주셨다. 우리는 식사를 함께하며 천사원 얘기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된 아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 된 아이 등 성공한 원생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언급하는 할머님 표정은 기쁨으로 넘쳤었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이 죽으면 유산을 천사원에 기증하겠다고 말했다.
할머님은 86년 12월, 93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현재 그분의 유해는 서울 마포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묘지에 안장돼 있다. 할머님의 유산은 천사원에 기증돼 장애인들을 위한 재활체육센터와 참빛교회를 건립하는 데 귀중하게 사용됐다. 나는 참빛교회에 할머님 흉상을 세웠다. 그분의 사랑 가득한 정신이 영원토록 천사원에 남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정리=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