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日 과거 추적 앞장 이시무라 히로시씨 “한국은 일본에 더 강하게 더 세게 책임 요구해야”
입력 2010-03-16 18:08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1부 일본 3대 재벌의 전쟁범죄
④ 채탄·제련으로 전쟁지원한 스미토코
역사 교사 이시무라 히로시(62)씨는 지난해 12월 한국을 찾았다. 손에는 일본 홋카이도 아카비라시 스미토모 탄광의 옛 조선인 숙소 터에서 파온 흙이 한 줌 들려 있었다. 방한 목적은 1945년 이 탄광에서 사망한 조선인 박경석(당시 29세)씨 유족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시무라씨가 입수한 아카비라시의 ‘화장 인허증’에 기재된 박씨의 사망 원인은 병사(病死). 하지만 검안 기록에는 ‘두개골절’ ‘복부내출혈’ ‘하악골(턱) 우쇄골 및 우견(오른쪽 어깨) 골절’ 등이 적혀 있었다. 이시무라씨는 “당시 별다른 탄광 사고 기록이 없었기 때문에 병사가 아닌 집단 린치(폭행)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국무총리 산하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의 도움으로 광주광역시에 살고 있던 박씨의 유족을 찾게 됐다. 유족에게 박씨가 머물던 숙소 자리의 흙을 건넸다. 또 일본 정부와 기업을 대신해 사죄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유족들은 “과거 (박씨의) 유골이 없어 대나무에 천을 입힌 인형을 넣어 무덤을 만들었는데…”라며 눈물을 흘렸다. 할아버지의 강제동원 사실을 몰랐다는 30대 손녀는 “이래선 안 되겠다”며 역사 공부를 다시 하겠다는 다짐도 했다.
한국인보다 더 적극적으로 일본의 과거를 추적해 반성을 이끌어내려는 이시무라씨는 아카비라 고등학교에서 20여년간 일본사와 세계사를 가르쳤다. 지난해 정년퇴임한 뒤에는 인근 지역 신도쓰가와 농업고등학교에서 강사 신분으로 계속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그가 조선인 강제동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아버지였다. 아버지 역시 탄광 노동자였다. 어릴 적 그의 기억 속에는 광복 후 한반도로 돌아가려는 조선인들이 부친에게 인사하러 들렀던 장면이 있다. 인정 많은 성격의 아버지는 타지에 끌려와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조선인들에 대해 동정적이었다. 이시무라씨는 “(부친이) 큰 도움을 준 건 아니고 먹을 것을 가져다 줬던 정도”라며 겸손해했다.
그의 조선인 강제동원 연구 작업에는 항상 학생들이 함께했다. 일본의 미래 세대에게 보다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리기 위한 노력이다. 그가 이끌었던 아카비라 고교 향토사연구부 학생들은 2005년 2월 스미토모 탄광 인근 호쇼지(寶性寺) 납골당에서 경남 사천 출신 조용문씨의 유골을 발굴했다. 이듬해에는 희생자 유족을 초청해 61년 만에 유골을 대면하는 행사를 갖기도 했다.
이시무라씨는 “민주당 정권으로 바뀐 지금이 기회다. 한국은 일본에 더 강하게, 더 세게 나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일본은 외국에서 크게 압력이 들어오면 태도가 바뀌는 나라라는 점도 강조했다. 일본 기업의 책임을 묻는 것과 동시에 한국인 스스로 강제동원 문제에 관심을 갖길 바랐다. 그는 “광주에서 만난 박씨의 손녀가 강제동원 역사 문제를 새로 공부하게 된 것처럼 다른 젊은이들도 더 많은 관심을 보였으면 한다”고 말했다.
아카비라(홋카이도)=특별기획팀 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hk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