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은폐·침묵의 세월 뚫고 조선인 강제동원 생생한 증명
입력 2010-03-16 18:09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1부 일본 3대 재벌의 전쟁범죄
④ 채탄·제련으로 전쟁지원한 스미토코
은폐와 침묵의 세월을 뚫고 오직 기록만이 살아남았다. 영영 묻힐 뻔했던 일본 기업의 조선인 대상 강제노역 방식을 오롯이 담고 있는 스미토모 고노마이(鴻之舞) 광산 명부 이야기다.
명부는 노무동원자 개개인의 이름, 주소, 특징 따위를 적어 놓은 장부를 뜻한다. 스미토모를 비롯한 일제의 전범 기업들은 조선인 관리를 위해 당시 각종 기록을 작성했으나 1945년 패전 이후 대부분 파기했거나 감춰왔다. 스미토모 역시 아카비라 탄광을 폐광할 때 트럭 3대 분량의 문서를 한꺼번에 소각했다는 증언들이 있다.
그래서 방대한 분량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고노마이 명부는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다. 물론 고노마이 명부도 이를 작성한 스미토모석탄광업 측이 스스로 내놓은 것은 아니다. 한평생 이 문제를 연구한 모리야 요시히코(70) 전 도우토(道都)대학 교수가 우연한 기회에 발견해 비로소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지난 1월 규슈 나가사키현 오무라시 자택에서 취재진을 만난 모리야 교수는 수만 쪽에 달하는 명부를 입수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1978년 신설된 홋카이도 몬베쓰(紋別)시의 도우토대에 부임했습니다. 고노마이 광산 사무소의 흙벽으로 된 창고에 자료가 있고, 쥐가 들끓는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이듬해 학생들과 함께 2t 트럭으로 세 번 왕복하며 자료를 옮겼습니다. 가져온 자료를 단순 분류하는 데만 3년이 걸렸습니다.”
고노마이 광산은 홋카이도 동북부 몬베쓰시 내륙 방향 안쪽 산지에 있다. 사방이 300∼600m의 산으로 둘러싸여 11월부터 4월까지는 눈에 묻혀 있다. 지금도 야생 곰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1917년 금 은 동 채굴권을 얻은 스미토모는 1939년부터 일제의 ‘노무동원계획’에 근거해 조선인 노무자를 끌고 왔다. 1942년 6월 말에는 조선인 노무자가 2000명을 넘었다.
모리야 교수가 입수한 자료에는 ‘사진 명부’에서부터 ‘임금대장’ ‘발신전보내역’ ‘노동재해기록’ ‘사망자 명부’까지 스미토모가 기록한 조선인의 일거수일투족이 적혀 있다.
개인별 사진 명부는 다른 강제동원 관련 기록물에선 찾아볼 수 없는 독보적 자료다. 스미토모는 조선에서 노무자가 오면 사진을 찍어 ‘고입고사표(雇入考査表)’를 만들었다. 본적지와 모집지, 태도와 풍채, 용모와 지능 정도, 사상 경향까지 총 14가지를 기록했다. 본인 희망 업무와 실제 담당 업무도 기록에 포함돼 있었는데, 조선인 대부분은 가장 힘든 ‘갱내부’에 배치된 것으로 나타났다.
1942년 경남 양산에서 끌려온 오소득(87) 할아버지의 경우 ‘태도:불량, 풍채:노동자풍, 용모 신장:4척9분 둥근 얼굴, 사상경향:없는 것으로 사료됨.’ 이런 식으로 기재돼 있다. 첨부된 사진 속 스무 살의 오 할아버지는 짧은 머리에 부리부리한 눈매를 보인다. 이는 국무총리 산하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의 구술집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머리를 갈 적에는 말이여, 다 깎았다. ‘매매(전부 다 확실히) 깎아라.’ 깎고 나서 우리 옷도 다 벗어 불고 국방색 같은 이런 얼금얼금한 거를 똑같이 입히고 머리 다 깎아놔. 도망 못 가라고.”(2009년 2월 5일 진상규명위 이선영 조사관 면담)
스미토모는 징용자가 탈주를 시도했을 때도 철저하게 기록해 놓았다. ‘소화 17년도분(1942년) 반도인 도망관계철’이란 보고서는 언제 어떻게 탈출해 어디서 붙들렸는지가 나온다.
‘지난 3월 21일 도망자 梁○○는 다른 2명을 선동하여 도망을 계획. 오후 7시경 도망하여 료(숙소)의 뒷산으로 잠입. 산속에서 날이 새기만을 기다려 해가 뜨자 경비본부(공사 중) 부근으로 도달. 몬베쓰 방면으로 가려다 수색 중인 경비수에게 체포. 원인:식사불만 때문이라고 하나, 일반 상황보다 계획적이었다고 사료됨. 처치:당 경찰에 강렬한 조사를 의뢰.’ 이밖에 탈주자의 인상, 의복, 특징, 휴대금품, 소재불명 시 상태 등이 기재돼 있다.
명부가 중요한 이유는 강제동원의 사실관계를 객관적으로 증명해주고 복원해주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의 구술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대부분 무학(無學)으로 끌려간 할아버지들은 기업이나 작업장 이름을 기억하는 건 고사하고 “앞사람 뒤통수만 바라보고 다녀왔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진상규명위 하승현 조사관은 “고노마이 명부는 단순히 피해 판정의 근거 자료를 넘어 강제동원 역사를 총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라고 말했다.
오무라(나가사키)=특별기획팀 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hk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