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극찬한 ‘조선시집’의 진실은… 일제말 김소운 日譯 시집 재조명
입력 2010-03-16 18:03
일본 문단에서 활동했던 시인이자 수필가 김소운(1907∼1981·사진)이 일제 말기에 일본어로 번역, 출간한 ‘조선시집’은 일본의 유명 문인들로부터 ‘명역(名譯)’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조선시집’은 김소월 한용운 김억 정지용 등 1905년 이후 한국 근대의 대표적인 시인들의 시를 모아 번역한 것으로 1940년 ‘젖빛 구름(乳色の雲·오른쪽 사진)’이란 제목으로 출판된 게 최초의 형태다. 시편을 더하고 보완해 43년 8월과 10월 ‘조선시집·전기’ ‘조선시집·중기’ 두 권으로 다시 출간됐고, 53년 두 권을 합한 ‘조선시집’으로 선보였다. 54년에 초판이 나온 이와나미 문고판으로 읽히고 있는 ‘조선시집’은 전전과 전후를 망라해 일본인들의 입에 거의 유일하게 오르내린 문학작품이다. 도쿄대학 비교문학과가 ‘김소운 문학상’을 제정해 동아시아 비교문학연구에 업적을 남긴 학자들에게 매년 시상하고 있을 정도이다.
국내에서도 “일본의 문학이 우리의 모국어를 집어삼키려고 덤벼들 때 거꾸로 우리의 문학을 일본으로 역수출하여 저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 개척자”(이근배)라는 상찬이 있을 정도였다.
윤상인 한양대 교수(일본언어문화학)는 학술지 ‘일본비평’(서울대 일본연구소 간행) 2010년 상반기 호에 기고한 ‘번역과 제국과 기억’에서 ‘조선시집’에 대해 색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조선시집’에 대한 일본인들의 우호적인 평가를 ‘지나친 쏠림과 결여’라는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무엇보다도 ‘조선시집’에 대한 논의가 원천언어인 한국어에 대한 검토 없이 일본어만을 토대로 이뤄어진 점을 문제 삼았다. 김소운의 칭송론자들은 한국어 원시(原詩)를 직접 본 적이 없고, 한국어 해독능력도 갖추지 못했거나 갖췄더라도 미미한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또 ‘왜, 무엇을, 어떻게 번역했는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결여돼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윤 교수는 “일본 지식인들은 조선의 근대시 그 자체가 아니라 ‘조선시집’이 구현한 ‘일본어 시가’로서의 놀라운 완성도에 갈채를 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인이자 불문학자인 구보타 한야(1926∼2003)의 “한 권의 조선시집에서 반짝이는 보석의 광채로 조탁된 일본어의 아름다움은 그 무엇보다도 내 귀를 즐겁게 한다”는 평가에서 알 수 있듯 ‘조선시집’에서 조선의 시인이나 시는 일본인들에게 부수적 존재였다. 칭송의 대상은 김소운과 일본어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김소운이 ‘조선시집’ 번역에서 일본에게 지나치게 동화된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형식상에서도 대부분의 원시를 일본 시가의 전형적인 운율형식인 7·5조로 바꾸어 놓았고, 내용 면에서도 원시의 세계를 일본 전통의 시적 규범과 정서 속으로 수렴시키는 번역 태도를 뚜렷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윤 교수는 ‘조선시집’은 수록된 시인들에 대한 폭력이었고 배반이었으며 그런 결과로 일본에서 ‘김소운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꼬집는다.
윤 교수는 “‘조선시집’에 조선문학의 공훈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어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일본인들에게 각인시킨 ‘조선시집’은 일본어와 일본문화의 승리로 회수되는 문화생산물이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시집 ‘대동아전쟁’의 시인 사토 하루오는 ‘조선시집’을 “조선인 스스로 일본어와 일본문화에 바치는 꽃다발”로 치부했다. 윤 교수는 “김소운과 같은 식민지적 주체를 통해 비폭력적 방법으로 제국과 식민지 간의 ‘가교’를 구축한 제국의 문화적 관용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의 재평가를 주장하기에 충분한 전사(戰史)로서 기억되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라동철 기자 rd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