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의 덫에 걸린 ‘모바일 코리아’
입력 2010-03-15 21:28
일본 휴대전화 업계는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갖추고도 ‘독자 진화’를 고집하는 바람에 세계 시장과 유리되고 말았다. 스마트폰 확산으로 모바일 인터넷 광풍이 불고 있는 요즘, 우리나라 관련 업계에선 각종 규제 때문에 일본처럼 ‘고립된 섬’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모바일 후발주자로서 선두권을 향해 빨리 달려가야 할 판국에 인터넷 실명제, 게임 사전심의, 모바일 금융결제 제약 등이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해외 기업 정책과 국내 규제의 충돌=최근 애플 아이폰에서 유튜브 동영상 올리는 것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방문자가 10만명을 넘는 인터넷 사이트는 본인 확인제(실명제)가 적용돼야 하는데 아이폰을 통해서는 실명 확인 없이 유튜브 업로드가 이뤄지고 있기 때문. 이에 대해 방송통신위원회는 “해외 사이트는 실명 확인을 거치지 않아도 제재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국내 사이트에 대한 역차별 논란이 불거지고 있는 것.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 탑재 스마트폰 ‘모토로이’에선 아이폰과 달리 유튜브 업로드가 안 되는 것도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있다.
해외와 국내 기준의 충돌은 이뿐만이 아니다. 구글의 안드로이드폰용 애플리케이션 장터 ‘안드로이드마켓’에선 국내 심의를 받지 않은 게임 4400여개가 탈법적으로 유통되고 있다. 이에 게임물등급위원회(게임위)는 구글 측에 심의 제도 준수를 권고했다. 하지만 “콘텐츠는 자유롭게 유통돼야 하며 문제가 생기면 사후에 조치한다”는 방침을 갖고 있는 구글이 순순히 따를 가능성은 적다. 어느 한쪽이 뜻을 굽히지 않는다면 관련 콘텐츠의 접속이 차단될 수도 있다. 앞서 애플은 국내 규제를 받을 수 없다며 아예 국내 앱스토어 상에서 게임 카테고리를 없앴다.
한국에서 사업을 하면서 한국 법을 따르지 않고 배짱을 부리는 해외 기업에 대한 비난도 나온다. 하지만 그보다는 “국내의 해묵은 규제가 모바일 콘텐츠의 유통 활성화를 가로막고 있다”는 비판이 힘을 얻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현행 국내법을 해외 기업에 느슨하게 적용하면 국내 업체들이 역차별을 당하게 된다”면서 “모바일 인터넷 혁명기를 맞아 폐쇄적인 규제들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스마트폰 공인인증서 장벽도 문제=전자금융거래 시 공인인증서 사용을 의무화한 규정을 완화하자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공인인증서는 마이크로소프트(MS)의 인터넷익스플로러에서만 작동하는 콘텐츠 구동기술인 ‘액티브X’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스마트폰에선 액티브X가 지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PC 기능이 강화된 휴대전화를 뜻하는 스마트폰에선 당연히 PC에서처럼 인터넷 뱅킹과 전자결제가 자유롭게 돼야 하는데 액티브X에 의존적인 국내 인터넷 환경 때문에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국내와 달리 선진국 은행들은 특정 OS나 웹브라우저에 구애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SSL’이라는 암호화 방식에 일회용 비밀번호인 ‘OTP’를 쓰고 있다. 최근 기업호민관실(중소기업 옴부즈맨)은 금융위원회와 행정안전부에 ‘SSL+OTP’ 방식을 허용해달라고 건의했다.
영국 옥스퍼드대 허준호 박사와 케임브리지대 김형식 박사팀도 최근 발표한 ‘한국 인터넷 뱅킹 보안’이란 제목의 논문에서 “액티브X 방식은 보안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는데다 이용자 편의성도 떨어뜨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부는 “10년 이상 안전성이 검증된 공인인증서 이외의 다른 보안 방식은 검토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이다. 행안부 등은 스마트폰용 공인인증서 이용기술 표준을 개발해 다음달부터 보급할 예정이다. 하지만 공인인증서만을 고수할 경우 새로운 OS가 나올 때마다 표준을 만들어야 하는 비효율이 뒤따른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민화 기업호민관은 “공인인증서를 폐지하자는 게 아니라 서비스를 골라 쓰도록 허용해달라는 것”이라며 “유선 인터넷 환경에선 한국이 세계 속에서 격리된 ‘갈라파고스 섬’에 만족했다면 모바일 인터넷 환경에선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라야 된다”고 주장했다.
천지우 기자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