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임항] 문제는 장시간 근로야…

입력 2010-03-15 23:36


“한 달에 이틀밖에 안 쉬어요. 나흘 정도는 쉬어줘야…주부들도 생활도 하고 가정을 좀 추스를 건데….” 종업원 7명인 전통적인 한식당에 근무하는 한 여성근로자가 지난해 한국노동연구원이 실시한 심층면접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매일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12시간 일한다.

‘24시간 사회’라는 한때의 신조어가 우리나라만큼 잘 들어맞는 곳이 있을까. 제조업 생산라인과 사무직만이 아니다. 무한경쟁을 해야 하는 영세 음식점 등 서비스 업소들은 1명이라도 찾는 손님이 있는 한 늦은 밤까지 문을 연다.

장시간 초과근로는 적어도 사회지표 측면에서 만악(萬惡)의 근원이다. 이는 과로사를 비롯한 국민 건강의 악화와 의료비지출 증가, 산업재해 증대, 일-가정생활의 양립 저해, 출산율 저하 등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게다가 경제 측면에서도 정규직 위주의 초과근로 체제는 지금 정부가 최우선과제라고 말하는 일자리 창출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 체제는 가장 혼자 돈을 벌어 가구의 생활비를 대는 전근대적 구조를 전제로 삼고 있다. 따라서 높은 청년실업률과 낮은 여성고용률의 원인이기도 하다. 지금 금속노조가 추진하는 것처럼 현대자동차가 주야간 맞교대제를 주간 연속 2교대제로 전환하면 고용은 20%가량 늘어난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장시간 근로관행은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고 있다. 2007년 현재 한국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2316시간으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29개 회원국 중 압도적 1위를 10년째 유지하고 있다. 2위인 헝가리보다 연간 400시간 이상 더 많다. 여기에는 물론 문화적 요인도 있지만, 원인은 좀 더 복합적이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에서는 대통령부터 장관, 기업의 고위 임원들에 이르기까지 높은 사람들이 휴가를 가지 않는 바람에 직원들은 상사 눈치를 보느라 휴가를 가지 못한다고 꼬집었다.

그런데 노동조합은 무엇을 해 왔나.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이고, 노동절은 8시간 노동 쟁취를 위한 유혈투쟁을 기리는 날이다. 최근에서야 노동운동 진영 안에서도 조직노동자들의 무관심이나 초과근로 선호가 장시간 근로체제를 방관하고 있다는 반성이 나왔다.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 정책연구원의 이상호 연구위원은 지난 2일 뉴스레터 기고문에서 “지난 20년간 민주노조 진영은 법정근로시간의 단축투쟁은 전개했는데도 불구하고 단체협약으로 노동시간 규정을 제도화하는 과제는 소홀히 했다”고 지적했다.

이 위원이 보기에 세계 최장의 장시간 노동체제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사용자와 정부에 있다. 그러나 “노조 또한 노동시간 단축보다는 조합원의 요구를 빌미로 할증수당 인상, 잔업과 특근보장과 같은 ‘잘못된 관행’에 매몰돼 온 것이 사실”이다. 언제부터인가 노조 위원장이 되기 위해 활동가가 조합원들에게 주말근무 몇 개를 따겠다고 약속해야 하는 지경이 됐다는 것이다. 초과근로 및 잔업수당의 비중이 너무 커져 버렸기 때문이다.

노조는 지금까지 임금을 온전하게 보전하지 못한다면 노동시간을 줄이기 어렵다고 버텨왔다. 그러나 자신의 장시간 근로가 본인의 건강과 가정생활뿐 아니라 잠재적 동료와 장차 자녀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이 위원은 “시간이 곧 삶, 돈보다는 삶”이라는 인식의 대전환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정부도 백화점식 일자리 대책에만 의존한 채 장시간 근로를 수수방관해선 안 된다. 공공부문이 모범을 보인다고 하지만, 사기업들이 보기에 도덕적 해이나 비효율로 폄하되기 일쑤다. 최소한 연차휴가 미소진 사례나 근로기준법상의 초과근로 금지조항 위반사례에 대해서는 과도기적으로라도 엄하게 처벌하거나 막중한 과징금을 물릴 필요가 있다. 사용자단체의 한 관계자는 “지금 경영계에서는 어떻게든 사람을 적게 쓰고 초과근로를 많이 시킬수록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면서 “(내가) 다른 현안에서는 사용자 편을 들지만 이런 관행만은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임항 전문기자 hngl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