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규환 (4) 천사원서 결혼하고 아이들도 ‘차별없이’ 키워
입력 2010-03-15 17:33
지금 은평천사원 주변엔 옛 모습이 사라지고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다. 그러나 50여년 전 설립할 때만 해도 이곳은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국말이라는 전형적 시골마을이었다. 녹번동 버스 정거장에서 내려 30분 정도 걸으면 군용 천막 2개가 보였는데, 그곳이 바로 천사원이었다. 산기슭에 있었기 때문에 천막 앞에 서면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나는 평생 너희들하고 같이 살 거다. 결혼도 하지 않겠다.”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천사원에 갔을 때 나는 원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치기어린 생각이었지만, 내 진심을 담아 한 약속이기도 했다. 나는 제대로 못 배웠지만, 이 아이들의 미래만큼은 더 나을 것이라 기대했다. 사실 이러한 희망이 없었다면 결혼하지 않고 고아들과 살겠다는 생각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천사원에 들어온 후로는 나도 천막 숙사에서 아이들과 함께 먹고 자고 했다. 나만 편하고 좋은 방에서 생활할 수는 없었다. 고생을 같이해야 빨리 정이 든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이 쑤시고, 몸 구석구석에서 이가 들끓었지만 행복했다. 아이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나는 서서히 그들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다. 어느새 아이들은 나를 ‘형’이나 ‘삼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결혼하지 않겠다’던 원생들과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내가 아내, 윤경숙 장로를 처음 만난 것은 1954년 대방장로교회에 나갈 때였다. 우리는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 활동을 같이했었다. 나보다 네 살 아래인 아내는 이화여자대학교 약대에 진학했을 정도로 수재였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1학년만 마치고 그만둔 상태였다.
59년 천사원에 입사한 이후 그녀를 우연찮게 다시 만나게 됐다. 그녀는 천사원 설립자인 윤성렬 목사님의 외손녀였던 것이다. 나는 그 무렵 천사원 총무로 일하던 동료가 먼저 결혼하는 것을 보고서야, ‘혼자 생활하는 것이 참 어렵고 궁색한 일이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그렇지만 감히 내가 윤 목사님의 손녀와 결혼하게 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번듯한 집안을 가진 데 반해 나는 배움도 짧고 집안 역시 보잘것없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내와의 만남과 결혼은 어떤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작용한 것 같다.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전부터 내 인생의 배우자를 준비해 두셨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와 아내가 평생을 천사원에서 일하도록 만드셨는지도 모를 일이다(아내는 평생의 동역자로서 현재 남성 정신지체 장애인 생활시설인 은평재활원에서 일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간의 교제 끝에 63년 김성렬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현재 2남 2녀를 두고 있다.
우리 식구들은 천사원 안에서 생활했다. 현재까지도 나와 아내는 천사원 숙소에서 산다. 나는 천사원 아이들과 내 자식들 간에 어떤 차별도 두지 않도록 힘닿는 데까지 노력했다. 내 아이를 따로 학원에 보낸 적도 없고, 용돈이나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 더 사준 적이 없었다. 심지어 입학식, 졸업식에도 시간을 내 참석한 적이 없다.
이런 아버지를 둔 자식들은 때로 서운했을 것이다. 여느 가족처럼 같이 나들이 한번 간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 나와 같은 길을 가는 우리 자식들도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정리=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