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수의 영혼의 약국(48)

입력 2010-03-15 09:45

어떤 개업 예배



저는 지금까지 목사로 살면서 꽤 많은 개업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곤혹스러움을 느끼곤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가게(기업)는 재화를 얻으려는 목적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더 많은 재화를 추구하는 사업의 원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땅한 일이지요. 그런데 왜 곤혹스러운가 하면, 과연 많은 재물을 도모하려는 또는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신에 적합한가 하는 것 때문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한 교우가 문을 여는 이 가게는 밥집입니다. 그냥 우리네가 아침 저녁으로 먹는 그런 밥을 짓는 집은 아니고 고기를 주로 파는 밥집입니다. 저는 어릴 때 밥 짓는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11명이나 되는 많은 식구였기 때문에 어머니의 밥솥은 아주 컸습니다. 가끔 어머니는 솥에 쌀을 앉힌 다음에 저에게 부강지에 불을 보라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글거리며 타는 불 앞에 앉아 있었지요. 그때마다 전 보았습니다. 밥이 끓을 때 그 무겁고 큰 솥 뚜껑을 들썩이며 밀고 올라오려던 무서움을 말입니다. 뭐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지켜보는 수밖에요. 그러면 솥뚜껑은 그 밀고 올라오려는 힘을 제압하려는 듯 들썩대곤 했습니다. 솥 가장자리론 가재의 거품처럼 밥물이 밀려 나왔죠. 그때 알았습니다. 밥이 되는 그 신비는 내리누르려는 솥뚜껑과 밀어 올리려는 김의 역학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밀고 올라오는 김의 힘이 너무 세서 솥뚜껑을 아예 벗겨 버렸다고 합시다. 반대로 솥뚜껑의 힘이 더 세서 끓는 김의 힘을 아예 봉쇄했다고 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면 쌀은 영원히 익지 않은 채 설어버리게 됩니다. 이 역학관계의 마술을 터득하지 못한 며느리들이 끓는 밥이 두려워 아예 솥뚜껑을 열어버리거나, 반대로 무턱대고 눌러 두려고 하다가 밥을 설리거나 눌려 버리고 마는 게 아닙니까? 끓어오르는 김이 있어서 밥은 비로소 익지요. 김을 누르는 솥뚜껑이 있기에 밥은 밥이 됩니다.

저는 밥을 지을 때 일어나는 이 역학의 관계, 즉 끓어오르는 김과 그것을 누르는 솥뚜껑이 지니는 힘의 대립적 관계가 인간의 욕망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갖는 대립각과 같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열을 받아서 끓어오르는 김은 인간이 지닌 욕망과 같죠. 더 많이 더 크게 가지려는 욕심은 마치 밥솥의 끓는 김과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십자가의 가르침은 반대로 솥뚜껑처럼 무겁게 인간의 욕망을 제어하라고 합니다. 이 가치관의 대립성이 우리를 늘 곤혹스럽게 하지 않습니까. 마치 둘 중의 하나를 골라야 할 것 같은 당혹감에 빠진다면 그는 웬만한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대부분은 어느 한쪽을 무시하고 제 좋은 대로 하지만요. 그런데요. 우리가 밥을 지을 때 단지 두 경우만 있는 것같이 생각을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 3의 기술이 있습니다. 그 기술이 있어서 밥이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를 앞으로 돌려서, 그렇게 끓어서 들썩이는 솥뚜껑을 보면서 어쩔 줄 몰라 할 때 어머니가 들어오시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당황해 하는 나를 없는 것처럼 여기면서 어머니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솥 가까이 갑니다. 그리고는 끓는 열과 솥의 크기에 비례된 어느 크기만큼 살짝 솥뚜껑을 젖힙니다. 너무 열어도 안 된다는 거, 너무 안 열어도 안 된다는 거 모두 아시죠? 그게 바로 제3의 기술입니다. 약간만 힘을 빼주는 슬기와 절제, 욕망과 제어의 에너지를 동시에 조율함으로써 생명의 밥이 되게 합니다.

그러니 밥은 끓는 열로 되는 것도, 그것이 손실되지 않게 하는 응축 에너지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지요. 제3의 기술이 있어야 대대손손 밥을 지어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겁니다. 대치하고 있는 두 에너지가 조금씩, 그러나 스스로에겐 치명적인 자기 부정인, 내어놓음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돈을 버는 일이란, 가게나 사업을 벌이는 일이란 마치 밥을 짓는 것과 같아야 한다고 봅니다. 사람이 어찌 욕망 없이 살 수 있겠어요. 욕망이 인간의 꿈에 추진력을 갖게 하고 진보를 가져오는 게 아닙니까? 사는 맛은 욕망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인간이 욕망으로만 살 수는 없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항상 말씀의 제어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말씀에 제어를 당해서 수도승처럼 죽은 사람마냥 살 수는 또 없는 거죠. 그 때 필요한 게 바로 솥뚜껑을 여는 지혜입니다. 그게 주님이 가르치는 자기부정의 삶, 즉 십자가를 지는 삶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적절하게 움직여 삶을 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삶의 법을 잊지 않고 실행하는 한, 이 가게가 잘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밥을 짓듯이 삶과 신앙을 지어가시길 축원합니다.

허태수(춘천 성암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