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학습효과?… 기관투자가·자산운용사 해외 부동산 집중 매입
입력 2010-03-14 21:43
지난해 11월 국민연금은 영국 런던에 있는 HSBC 본사 빌딩을 샀다. 인수 가격은 7억7250만 파운드(당시 환율로 약 1조5000억원). 국내 자본의 해외 부동산 매입 거래 중 최대 규모였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진이 여전할 때라 시장에서는 투자 시점과 규모에 놀랐다. 국민연금은 리스크가 낮은 부동산으로 안정적 수익률을 얻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하지만 실제로 국민연금이 노린 효과는 따로 있었다. 세계 금융산업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런던에 위치한 건물이라는 점, 외부 충격으로 가격이 폭락한 탓에 추가적 자본 이득을 노릴 수 있다는 점이다. HSBC 본사 빌딩은 런던의 새로운 금융중심지인 카나리 워프(Canary Wharf)를 대표하는 랜드 마크(주요 지형지물)다. HSBC는 2008년 이 건물을 8억3800만 파운드에 매입했었다.
국내 자본이 해외 부동산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대상은 미국 영국 일본 등 선진국은 물론 중국 말레이시아까지 다양하다. 기관투자가는 선진국 오피스 빌딩을 매입하고, 자산운용사는 해외 부동산에 투자하는 공모·사모펀드를 내놓고 있다. 왜 자산시장이 불안정한 때 가격이 폭락한 해외 부동산을 사들일까. 금융업계는 그 이유를 ‘외환위기 학습효과’로 설명했다.
◇얼마나 진출하고 있나=14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해외 부동산에 투자하는 공모·사모펀드 출시 건수는 지난해 1분기 0건에서 4분기 3건으로 늘었다. 펀드 설정액은 2007년 1월 2865억원에서 2008년 1월 1조1863억원, 지난해 1월 1조7550억원, 지난 1월 2조481억원까지 증가했다.
자산운용사들은 이런 펀드를 기반으로 해외 부동산을 사고 있다. 홍콩과 상하이에서 빌딩을 매입해 운용하고 있는 미래에셋맵스는 최근 중국, 브라질 시장 조사를 하고 있다. 다올자산운용은 호주 영국 싱가포르의 오피스 빌딩 매입을 검토하고 있다. 수출입은행에 따르면 해외 부동산에 투자한 돈(부동산 임대 관련 투자)은 지난해 1분기 875만 달러에서 4분기 3억800억 달러로 증가했다.
기관투자가 중에는 국민연금이 적극적이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7월부터 최근까지 해외 부동산 6건에 3조원에 가까운 돈을 투입했다. 투자한 해외 부동산은 도쿄 도심업무지구에 있는 오피스 빌딩(칼라일과 공동 인수), 영국 런던 오피스 빌딩 2곳, 호주 시드니에 있는 오로라 플레이스, 영국 개트윅공항(지분 12% 인수) 등 다양하다. 교직원공제회와 사학연금도 해외 부동산 투자에 앞다퉈 나서고 있다.
◇당한 만큼 돌려준다?=해외 부동산 투자에 관심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우량자산이 싼 가격에 나온다는 데 있다.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선진국의 경우 경제위기 불안감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지금이 우량자산을 사들일 적기다. 중국 등 신흥국은 지속적 성장이 기대되기 때문에 선점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 말했다.
또 외환위기 당시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웠던 교훈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가격이 떨어졌을 때 사두면 위기 극복 뒤에 높은 값으로 되팔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한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외국 투자은행(IB)과 사모펀드 등은 싼값에 국내 부동산을 사들여 막대한 시세 차익을 얻었다. 국제 사모펀드인 론스타는 2001년 서울 역삼동 스타타워(현재 강남파이낸스센터)를 6600억원에 사들인 뒤 2004년 싱가포르투자청에 팔아 2700억원을 벌었다.
김찬희 기자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