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규환 (3) 윤성렬·아펜젤러 헌신에 감동, 은평천사원 입사

입력 2010-03-14 20:29


윤성렬 목사님. 내 삶의 스승이자, 지난 50여 년간 내가 그토록 닮기 위해 애썼던 분이다.

1885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신 윤 목사님은 1914년 목사 안수를 받고 황해도 해주 지방에서 목회를 시작하신 뒤 54년 은평감리교회를 설립하는 등 은퇴하실 때까지 20여 교회를 세우셨다. 또 평생 진실, 근면, 절약과 구제의 정신을 몸으로 보여주셨다.

“비싼 것을 먹든, 싼 것을 먹든 간에 시간이 지나면 같아지는 것이고, 우리가 입고, 보고 듣는 것, 소유하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 소용이 없어진다. 또한 참된 삶은 진실해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르게 살려고 할 때 그 사회 전체가 아름다워진다.”

지금도 기억하는 그분의 가르침이다.

윤 목사님은 전쟁고아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셨다. 당시 전쟁 통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자기 한 몸 지킬 능력조차 없이 거리에 방치됐다. 윤 목사님은 한 성도의 방을 빌려 고아원을 시작했다. 어느 날 윤 목사님의 아들이자 훗날 장인이 되신 윤삼열 장로님이 “우리 아버지가 불광동 근처에서 고아원을 시작했는데 참 어렵다. 와서 도울 수 있나”고 내게 물으셨다. 나는 순순히 주말과, 일이 일찍 끝나는 날이면 고아원에 나가 봉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윤 목사님을 처음 만났다. 목사님이 서울역에서 고아들을 데려오면 나는 아이들을 씻기고, 머리를 깎아주고, 옷을 갈아입혔다. 글을 가르치고, 교과서를 얻어다가 다른 공부도 도와줬다. 초등학교 3학년 이하, 4학년 이상, 중학교 이상, 이렇게 세 그룹으로 나눠 아이들을 가르쳤던 기억이 난다. 이북의 내 고향 후배들도 셋이나 만났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더 마음이 끌렸는지도 모른다.

59년 3월, 윤 목사님은 아펜젤러 할머님, 잭 타이스 선교사 등과 함께 은평천사원을 세우셨다. 미군에게 지원받은 24인용 천막 두 개가 당시 시설의 전부였다. 천막 하나는 낮에는 교실, 밤에는 숙사로 쓰였고, 다른 천막은 식당과 창고로 사용됐다. 거기에 40명 정도의 고아들이 살았다. 나는 부모도 없고 집도 없는 이 아이들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공부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참 좋았다. 그들은 종종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윤 목사님이 은평천사원의 아버지라면, 아펜젤러 할머님은 어머니였다. 아펜젤러 할머님은 1890년대 북한 지역에서 주로 활동한 미국인 선교사 아서 노블의 큰딸이자,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의 큰 며느리다. 본명은 루스 노블 아펜젤러지만 나는 그냥 아펜젤러 할머님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이 그분 나이 63세 때였고, 내게는 지금도 친근한 할머니로 기억되고 있다.

그해 4월 은평천사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날, 나는 정동에 있던 아펜젤러 할머님의 자택에 초대받았다. 할머님은 첫 말씀에 “사랑을 많이 갖고 있느냐”고 물었다.

“고아들과 같이 일하려면 첫째도 사랑, 둘째도 사랑, 셋째도 사랑이야. 사랑이 많고, 그 사랑을 나눠 줄 수 있는 사람만이 고아들과 일할 수 있어. 먹고 입고 자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이거든.”

할머님의 헌신적인 사랑과 봉사는 내 삶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나는 당시 직장이던 주한 미대사관 관리부에 사표를 던지고 은평천사원에 입사했다. 스물일곱 살 때였다.

정리=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