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입력 2010-03-12 17:29


마태복음 5장 3절

성경에 나타난 말씀 중에 어떤 말씀은 그냥 읽기만 해도 은혜가 됩니다. 그러나 어떤 구절은 반드시 그 단어의 의미를 알아야만 더 큰 은혜가 됩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의 팔복이 그렇습니다.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한 단어 한 단어의 원 의미를 바로 알 때 더 큰 은혜가 솟아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복이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의 복입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것이 어떻게 복이 될까요? 일반적으로 부한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요, 가난한 사람은 저주받은 것으로 알고 있던 유대 사회는 예수님의 말씀이 당연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가난이라는 단어에 대해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헬라어에는 가난을 뜻하는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첫째는, 페네스란 단어이고, 둘째는 프토코스란 단어입니다. 페네스는 남는 게 없고 여유가 없는 가난, 즉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가난을 말합니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가난입니다.

그러나 프토코스는 파산을 당하거나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가난입니다. 오늘날 양식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10초에 한 명 꼴이라고 하는데 이처럼 프토코스는 얻어먹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가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난은 바로 두 번째 프토코스의 가난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비천하고 가장 무력한 사람의 가난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무슨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저주라고 부를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은 이런 물질적 가난이 아니라 심령의 가난이요 마음의 가난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는, 정말 지금 당장 손쓰지 않으면 곧 굶어죽게 되는 것처럼 가난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비우고, 완전히 항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천국이 임하는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다윗과 같은 사람입니다. 다윗은 시편 곳곳에서(시편 40:17; 70:5, 86:1) 자기는 가난한 사람이라고 부르짖습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이 어떻게 안 해 주시면 죽게 될 것처럼 다급하고 애달픈 심정으로 절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듯이 시간이 그는 어느 만큼 흐른 뒤엔 더 이상 가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그의 마음은 언제나 가난했습니다. 양치기 때나, 망명생활 할 때나, 왕이 된 후에도 변함없이 가난한 마음을 유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예수님은 천국이 임할 것이라는 선언을 하십니다. 이 천국이 임하는 복은 죽어서 가는 그 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나라 말이든 감탄사에는 시제가 없고 현재 시제입니다. 그런데 팔복은 모두 감탄사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것은 죽어서 천국을 누린다는 것만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그 현장에서 천국을 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허락하시는 진정한 가난의 복을 마음껏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백동조 목사 (목포 사랑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