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조직 “보이스피싱으로 큰 돈 벌어라” 미끼… 중국인 유학생들 낚인다
입력 2010-03-11 21:54
지방 국립대에 재학 중인 중국인 유학생 창모(22)씨는 올 초 중국 유명 포털 사이트 QQ.com에서 ‘큰돈 법니다’라는 제목의 채팅방에 접속했다. 생활비가 없어 고생하던 창씨는 중국인 가오모(30·여)씨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보이스피싱으로 가로챈 돈을 은행 현금인출기에서 빼오라는 것이었다. 수고비는 총 수입액의 5%라고 했다. 창씨는 흔쾌히 승낙했고 함께 일할 사람을 포섭했다. 수도권 사립대 경영학과 3학년인 중국인 거모(24)씨였다.
가오씨는 우리말 사투리를 능숙하게 구사해 피해자의 경계심을 풀었다. 그는 보이스피싱 조직에 처음 가담했을 당시 중국인 총책으로부터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가오씨는 2007년 12월 결혼한 경상도 출신 남편이 사용하는 사투리를 따라 했고 텔레비전에서 전라도 사투리를 배웠다.
지난 1일 가오씨는 그동안 갈고 닦은 한국어 실력을 토대로 본격적으로 범행을 시작했다. 능숙한 사투리의 효과는 커 5일 동안 5200만원을 가로챘다. 피해자 중 한 명인 주부 김모(55)씨는 4일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에 속아 가오씨가 지정한 계좌로 2500만원을 송금했다. 하지만 이체한 돈이 다음날까지 자신의 계좌로 돌아오지 않자 김씨는 돈을 보낸 계좌에 대해 지급정지를 요청했다.
돈을 받은 계좌가 지급정지돼 경찰 감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신출내기 인출책 거씨가 알 리 없었다. 모 은행 서울역 지점에서 돈을 빼내려던 거씨는 5일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거씨를 창씨, 가오씨와 차례로 접선시켜 모두 체포해 9일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 이들은 경찰 조사에서 “한국에 오면 좋은 교육을 받고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며 “돈을 벌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사건을 담당한 서울 강동경찰서 염태진 지능팀장은 11일 “중국인 유학생은 순수하게 공부하려는 학생과 돈을 벌어야 하는 학생 두 부류로 나뉜다”며 “후자가 보이스피싱 유혹에 쉽게 노출된다”고 설명했다. 고려대 대학원에 재학 중인 중국인 왕모(28)씨는 “중국 포털 사이트에서 보이스피싱에 가담할 사람을 구하는 광고를 쉽게 찾을 수 있다”며 “가난한 중국인 유학생들이 현혹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총책, 연락책, 송금책, 통장모집책, 인출책으로 구성된다. 중국인 유학생들은 주로 가장 말단인 인출책을 맡는다. 복잡한 교육이 필요 없는 작업인데다 동일 인물이 은행 CCTV에 자주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보이스피싱 조직이 신출내기를 선호한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사기 친 돈을 빼내기 위해 많은 인출책을 모집한다. 중국인 유학생들은 쉽게 조직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조직에서 빠져나오는 건 쉽지 않다. 경찰청 사이버수사대 관계자는 “총책은 중국에 있는 유학생 가족의 신변을 볼모로 협박한다”며 “유학생들이 한번 발을 담그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가난한 중국인 유학생들이 조직에 들어가 또 다른 피해를 양산하는 것을 막을 대책이 없는 것도 문제다. 중국인 유학생이 450명에 달하는 서울 지역 모 대학 관계자는 “입학 오리엔테이션을 중국어로 해주는 것 말고는 지원책이나 교육 프로그램은 없다”고 말했다.
조국현 기자 joj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