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는 핸드백 아니다”-“여성 몸 정책대상 아냐”… 프로라이프 vs 프로초이스 ‘맞짱 토론’
입력 2010-03-11 15:00
인파가 북적이는 대로(大路) 한복판. 뇌관에서 연기 솟는 폭탄 하나가 떨어졌다. 서구사회에서는 진보-보수 최대 논쟁거리 중 하나. 생명권인가? 선택권인가? 낙태 논쟁이 우리 사회에서도 폭발할 조짐이다.
지난달 3일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불법 낙태시술 병원 3곳을 고발한 후 한 달여. 가장 격렬한 반발은 여성계에서 쏟아졌다. 미디어는 논쟁으로 달궈졌다. 낙태에 반대하는 프로라이프(pro-life)와 여성의 선택권을 옹호하는 프로초이스(pro-choice) 대표 논객들은 TV 토론회 등을 오가며 일합씩 겨뤄왔다.
남은 매치가 몇 번인지 알 길은 없다. 어쩌면 몇 년간 이어질 길고 지루한 논쟁의 입구. 그 앞에서 9일 두 사람이 만났다. ‘프로라이프 의사회’ 이동욱(40·한나산부인과 원장) 홍보위원장과 여성단체 ‘한국여성의전화’ 정춘숙(46) 상임대표다.
낙태는 알려진 주제다. 서로 상대가 할 말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뜻. 두 사람은 본론으로 직진했다. 논쟁은 시작부터 제한속도를 넘나들었다.
△이동욱 위원장=‘여성이 출산 주체’라고 말하지만 출산에서 여성은 주체가 아니라 한 당사자다. 태아도 당사자다. 여성들이 ‘내 것 내 맘대로 하는데 정부가 왜 간섭하느냐’고 하는데 그건 태아를 핸드백처럼 여기는 거다. 굉장히 위험한 논리다. 태아는 생명이다. 핸드백하고는 다르다.
△정춘숙 대표=물론 핸드백하고 비교하겠는가(웃음). 예가 적합하지 않다. 내 몸이니까 내 맘대로 하겠다, 그게 아니다. 임신 상태를 핸드백 들고 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사회적 합일점에 이르기가 굉장히 어렵다.
△이 위원장=지금 상태로 놔두자는 말인가. 5번, 10번씩 죄책감도 없이 피임 대신 낙태하는 여성들이 있다. 그걸 그냥 내버려두나. 병원에서 보면 유부녀들이, 그중에는 불륜 커플도 많은데, 낙태 받고 웃으면서 팔짱 끼고 나간다. 그런 상황을 방치하나.
△정 대표=낙태를 쉽게 한다지만 그렇지 않다. 출산은 여성에게 일생을 좌우하는 문제다. 수십 번 생각하고 어렵게 결정한다. 그렇게 내린 여성의 결정이 존중돼야 한다. 인구 억제 정책을 펼 때는 애 많이 낳으면 야만인 취급하고, 저출산 시대에는 아이 낳지 않는 여성을 매국노로 몰아간다. 국가 정책이 여성의 몸을 대상화한다.
△이 위원장=보건복지가족부 자료를 보면 기혼여성 낙태 이유 70%가 ‘자녀 불원(不願)’이다. 얘는 원하지 않으니까 없애고, 얘는 원하니까 살리고 그런 건가. 그걸 고뇌 끝에 내린 결정으로 미화하면 곤란하다. 낙태를 연 1만건(현재 34만건) 이하로 줄이는 게 목표다. (여성계도) 무조건 단속 반대만 하지 말고 (낙태 줄이는)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낙태천국을 만들자는 건 곤란하다.
△정 대표=여성도 힘들어한다. 산부인과 가는 거 좋아하는 여자 없다. 죄책감 없이 낙태하는 것도 아니다. (쉽게 낙태하는) 몇 사람을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이 위원장=일반화하는 게 아니고 내 직업이 산부인과 의사다. 일반적 현상을 얘기하는 거다.
△정 대표=그런 사람만 만났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만나는 사람은 아니다.
△이 위원장=누가 더 (낙태 원하는 여성들을) 많이 만나겠는가.
△정 대표=환자만 만난 거 아니냐. 나한테는 상담하는 사람이 많이 온다.
△이 위원장=상담 사례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지만….
아내 발언권과 낙태율의 관계
△정 대표=기혼여성들이 어떤 상태에서 성관계를 맺는지 가정 내 권력관계를 봐야 한다. 신성자(경북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연구를 보면 기혼여성의 30% 정도는 강제로 성관계를 맺은 경험이 있다. 아내 강간이다. 그런 상태에서 피임이 얼마나 가능하겠는가.
△이 위원장=모자보건법 제14조에 강간·준강간의 경우 이미 합법적 낙태 범위에 들어가 있다. 아내 강간도 마찬가지다. 아내 강간은 누범일 테니 증거 수집하고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 원치 않는 임신을 줄여나가야지, 원치 않는 출산을 줄이는 건 출발이 잘못됐다.
△정 대표=그러려면 가정 및 사회에서 여성 지위가 현격히 달라져야 한다. 그게 내일모레, 아니면 1년 후 가능해지나.
△이 위원장=가능하다.
△정 대표=비현실적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주장한 지 30년 됐지만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다. 아내 강간도 오랫동안 얘기했지만 한 번도 처벌된 적이 없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변하나.
△이 위원장=다른 얘기다. 아내 강간은 범죄다. 그간 법원이 처벌하지 않았을 뿐이다.
△정 대표=왜 처벌을 안 해왔다고 생각하나. 아내가 남편의 성적 요구에 응해야 한다는 뿌리 깊은 사회적 인식이 한번 처벌한다고 바뀌나. 우리 현실이 이런데 ‘니들 무책임하게 성관계하고 나서 막 떼는 것 아니냐’ 이러면 곤란하다. 낙태만 딱 떼어놓고 단속부터 하는 게 문제다.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 범위와 수준 같은 제반 여건이 통합적으로 논의돼야 한다.
△이 위원장=낙태 문제만 떼어내 얘기하는 거 아니다. 원치 않는 임신을 줄이자는 거다.
태아 vs 산모
△이 위원장=태아의 생명권과 산모의 선택권이 충돌하는 게 핵심이다. 산모의 선택은 태아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태아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다. 무조건 살아야 한다. 당연히 두 가지 중 태아 생명권이 먼저다.
△정 대표=언제부터 생명이라고 보는가.
△이 위원장=잉태된 순간부터다. 모든 의사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에서 그렇게 인정한다.
△정 대표=그게 논란의 지점이다. 출산 후 인공적 도움으로 생존할 수 있는 6∼8개월 이상을 생명으로 보기도 한다. 논의가 깊이 이뤄져야 한다. 외국을 보면 생명권과 선택권의 중간지점을 찾아나간다. (임신) 12주를 기준으로 조건을 단다든지, 상담을 의무화한다든지, 며칠 생각할 시간을 둔다든지….
△이 위원장=물론 (태아의 생명권보다) 산모의 선택권을 존중해야 하는 상황도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정 대표=그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없는 사회경제적 이유가 들어가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중 23개 나라에서 사회경제적 이유로 인한 낙태가 인정된다.
△이 위원장=행복하게 해주지 못할 거면 없애자는 건가. 그렇다면 장애아는 태어나도 행복하지 않으니 없애야 하나. 21년째 사회복지시설에 다니면서 장애아들을 봐왔다. 행복의 기준이 뭔가. 나와 그들 중 누가 더 행복한가. 인간이 판단하고 결정할 수는 없다. 그건 오만이다.
△정 대표=장애인 미혼모 지원은 (여성단체가) 지금까지 해온 주장이다.
△이 위원장=여성 선택권을 말하지만 사실 미혼모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대부분 부모가 임신한 딸을 끌고 와서 ‘낙태시켜 달라’고 한다. ‘처녀가 임신하고 무슨 할말이 있느냐’는 식이다. 낳고 싶은데 낙태를 강요당하는 여성도 생각해야 한다.
△정 대표=물론이다. 다만 낳고자 하는 마음이 존중받듯, 포기하는 입장도 존중돼야 한다는 거다. 낙태 단속의 부작용은 어떻게 생각하나. 과거에 30만∼40만원 하던 초기 낙태 비용이 요즘 단속 때문에 150만원까지, (임신) 12주 이후는 600만원까지 뛰었다. 강간 피해자에게 고소장을 갖고 오라는 경우도 있다.
△이 위원장=비약이다. 현행법상 강간의 경우 낙태를 위한 증명은 필요 없다. 솔직히 단속을 해도 현재 산부인과 가운데 50%는 (낙태 시술을) 하고 있다. 가보면 다 한다.
정 대표는 18년간 여성운동에 투신한 대표적 활동가. 논쟁이라면 이골이 난 달변이다. 그러나 “거름 지고 장에 가겠느냐. 나도 철학이 있다”며 말문을 연 이 위원장은 정 대표보다 더 많이, 더 오래 말했다. 대담 후엔 “설득을 많이 한 것 같다”며 흡족해했다. 정 대표 반응은 정반대였다. “여성의 몸을 태아의 환경으로만 본다”며 근본적 인식 차에 답답해했다. 70여분 토론으로 양측은 한발 다가간 걸까, 멀어진 걸까. 갈 길은 멀어보였다.
연간 34만건… OECD 최고
‘낙태공화국’으로 악명 높은 한국의 낙태율은 인구 1000명당 31명.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 2005년 보건복지가족부의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및 종합대책 수립’ 보고서에 따르면 연간 낙태 시술은 34만2433건(추정)이다. 그 가운데 기혼여성 낙태가 약 20만건(58%)으로 미혼여성(약 14만건·42%)보다 6만건이나 많다..
모자보건법 제14조는 강간 및 준강간에 의한 임신, 혈족 또는 인척 간 임신 등 5가지 경우에만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현재 낙태 시술의 대다수는 불법이다.
정리=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