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규환 (2) 주경야독 고달픈 나날… 영어공부는 쉬지않아
입력 2010-03-11 21:34
우리 식구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년이 지난 1948년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 함께 살자는 큰 형님의 권유에 따른 것이다. 교사를 하던 형님은 당시 경찰 간부가 돼 있었다. 그러나 형님네 도움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셨던 어머니는 그 몇 달 뒤 나와 동생들을 데리고 지금의 용인 신갈 근처에 거처를 마련하셨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장사를 하셨고, 나는 나무를 해서 시장에 내다 팔아 살림에 보탰다.
6·25 발발 이듬해 1·4 후퇴가 있자 우리 가족도 피란길에 올라 대구에 자리를 잡았다. 동천 개울둑에 형성된 천막촌이었다. 나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날품팔이라도 해야 했다. 매일 아침 일곱시면 어김없이 인력시장으로 갔다. 다섯 명, 열 명씩 뽑아가는 일거리에 투입되면 하루 몇 십 원은 벌 수 있었다. 내 나이 열일곱 살 때였다.
어느 날 미국인과 한국인이 함께 와 인력을 차출했는데, 운 좋게 나도 거기 낄 수 있었다. 그들을 따라간 곳은 지금의 대구 동천비행장이었다. 822공병대가 주둔하며 비행장 건설을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며칠간 기름통을 굴려 옮기는 작업을 거들었다. 그런데 한 미군 장교가 나를 부르더니 사무실 청소를 맡으라고 했다. 나는 요령을 피우지 않고 성실하게 그 일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식으로 월급을 받으며 일하게 됐다. 내 생애 첫 직장인 셈이었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미군과 마주할 기회가 많았다. 나는 영어에 관심과 흥미가 생겼고, 어설프게나마 영어를 깨우치기 시작했다. 서울이 수복되면서 우리 가족도 피란생활을 마감하고 서울로 돌아가게 됐다. 그러나 직장을 떠나기 서운했던 나는 6개월간 더 대구에 머문 뒤 상경했다.
형님이 새로 마련해준 서울 대방동 집으로 돌아온 나는 정식으로 영어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장차 내 앞가림을 하는 데 남들이 갖지 못한 기술 하나 정도는 있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어머니도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나를 늘 안타깝게 여기시며 “공부해라, 공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영등포에 있던 일진학원에 등록했다. 아침 7시에 영어 수업을 들은 뒤 낮에는 공사판에서 막일을 하는 식이었다.
열아홉 살이 되던 해 노량진에 있는 동양공업고등학교 토목과에 진학했다. 뒤늦게 학업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망설여지기는 했지만, 검정고시를 보지 않아도 학비만 내면 진학이 가능하다는 말에 결단을 내렸다. 야간 학교를 다니면서도 나는 영어 배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 서울공업고등학교 안에 있던 미군 야전병원에서 급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내가 눈치껏 영어를 구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군은 군수품 창고 담당 직원으로 나를 고용했다. 나는 승진을 거듭해 고등학교 3학년 때인 54년, 병원 군수품 창고의 책임자가 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대방장로교회에 출석했는데, 나는 ‘내가 평생 함께할 곳은 교회’라는 생각에 주일학교 교사와 찬양대 활동에 열심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 장인이신 윤삼열 장로님의 권유로 고아원에서 전쟁고아들을 위한 봉사를 시작했다. 그때는 거리마다 고아들이 넘쳐났다. 이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구걸하고 다리 밑이나 남의 집 담장 옆에 거적을 치고 밤을 지냈다.
정리=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