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정승훈] 새로운 영웅을 기다리며

입력 2010-03-10 18:13


10리를 뛰어도 끄떡없을 것만 같고, 100리를 걸어도 지치지 않을 것만 같은 꽃다운 나이 열여덟에 그는 골육종 진단을 받았다. 암세포는 하루가 다르게 그의 몸으로 퍼져 나갔다. 의사는 오른쪽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했다.

수술 전날, 그는 우연히 집어든 마라톤 잡지에서 휠체어를 탄 채 마라톤에 참가해 42.195㎞를 완주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었다. 곧 한쪽 다리를 잃게 될 상황이었지만 그는 좌절하기보다는 ‘언젠간 나도 휠체어를 타고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처럼 달리고 말거야’라고 결심했다.

다음 날, 그의 한쪽 다리는 사라졌다. 오른쪽 무릎 위 6인치까지가 절단됐다. 수술 후 의족에 의지한 채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병동에 입원해 있던 그는 암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 특히 어린이 암 환자들을 보면서 돕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라톤 잡지에서 본 얘기가 떠올랐다. 암 연구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캐나다 대륙 횡단 마라톤 아이디어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난 1980년 4월 12일. 캐나다 동부 뉴펀들랜드주 세인트존스의 바닷가에서 스물두 살이 된 그는 한쪽 다리에 의족을 단 채 서 있었다. 캐나다 지도가 그려져 있는 티셔츠를 입고 있던 그는 잠시 후 의족을 단 오른쪽 발을 내디뎠다. 캐나다 대륙 8000여㎞를 횡단하는 도전이 시작됐다.

하루 하루, 아니 한 발짝 한 발짝이 고통의 연속이었다. 조심하면서 걷는 것만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의족으로 달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이 힘든 일이었다. 의족은 자주 말썽을 일으켰고 의족과 맞닿은 다리의 절단 부위에는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왼발과 의족으로 6개 주를 통과했다. 힘겨운 그의 마라톤이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매일 마라톤을 하듯 42㎞를 달리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143일을 달렸다. 세인트존스의 바닷가로부터 5300여㎞를 달렸다. 하루 평균 37㎞를 달린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144일째 되던 날엔 더 이상 달릴 수 없었다. 암이 재발했고, 암세포가 폐로 전이됐기 때문이었다.

또다시 처절한 투병 생활이 시작됐다. 그는 병상에서도 “내가 끝내지 못하더라도 마라톤을 이어갈 사람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몇 개월 후 그는 결국 숨을 거뒀다. 그의 이름은 테리 폭스(Terry Fox)였다.

암 퇴치를 위한 그의 뜻은 캐나다를 넘어 세계로 확산됐다. 매년 9월이면 전 세계 수십개국에서 암 퇴치 기금을 모으기 위한 ‘테리 폭스 달리기 대회’가 열린다. 캐나다에선 추모 열기가 뜨거워지고 기부금을 내려는 행렬이 줄을 잇는다.

캐나다인들은 그를 장애인 영웅으로 추앙한다. 장애를 뚫고 도전했던 그의 달리기가 자신들의 가슴을 움직였고 사회에 나눔의 소중함을 확산시켰다고 믿기 때문이다.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의 개막식과 폐막식이 열렸던 BC 플레이스 스타디움 정문에 그를 추모하는 개선문을 세운 이유는 그 뜻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오는 13일(한국시간) 2010 밴쿠버 동계 장애인올림픽(패럴림픽) 개막식도 그가 서 있는 BC 플레이스 스타디움에서 열린다.

25명의 한국 선수들도 이번 밴쿠버 동계 패럴림픽에 참가한다. 이전 동계 패럴림픽까지만 해도 경기에 출전하는 한국 선수는 네댓 명에 불과했지만 올해엔 동계 패럴림픽 5개 전 종목에 선수들이 출전한다. 국제 대회에서 착실하게 성적을 쌓아 출전권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장애인 스포츠의 저변 확산과 경기력 향상을 위해 꾸준히 노력한 결과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엔 거리로, 체육관으로 나서지 못하는 장애인이 많다. 시설과 여건의 문제도 있지만 인식의 문제가 크다. 이번 대회가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 스포츠를 확산시킬 수 있는 촉매가 되기를 기대한다. 동계 패럴림픽에서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기다리는 이유다.

정승훈 체육부차장 s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