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신의 깜짝 한수] 비씨카드배 16강전 ● 김기용 5단 ○ 박승현 6단

입력 2010-03-10 17:31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20대 초반에 이 구절을 보고 의미도 모른 채 가슴이 벅차오르던 때가 있었다. 처음엔 의미를 몰라서 몇 번이고 되새겨 봤던 이 문장. 한참 잊은 듯 지내다 우연한 기회에 이 문장을 다시 접하게 되자 번개를 맞은 것처럼 찌릿하다. 나는 현재 알을 제대로 깨고 나왔는지, 날갯짓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방향은 잘 잡아서 날고 있는 지….

날갯짓을 하며 몇 번이고 실패를 하는 어린 새를 보는 어미 새의 마음은 아프다. 하지만 나는 법을 가르쳐 줄 수는 있어도 날개가 되어 줄 수는 없기에 언젠가는 둥지를 떠나 넓은 창공으로 보내줘야 한다. 휙 하고 지나가는 하늘의 한 마리 새에 움찔 놀라 올려보다가 나도 멋진 비행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연구실 입구를 들어선다.

계단을 올라 문을 여니 익숙한 멤버들이 TV에서 생중계되고 있는 바둑을 보고 있다. 무슨 바둑인가 보니 비씨카드배 16강전 박승현 6단과 김기용 5단의 대국이다. 돌들이 한참 올려 있는 것을 보니 거의 막바지에 들어서 있는 것을 알겠다. 초반엔 흑이 좋았는데 어느 순간에 백이 좋아졌다고 한다. 이 상태로는 백의 승리가 너무도 확실한데 흑을 든 김기용 5단의 표정은 태연하다. 표정 없기론 상대인 박승현 6단도 마찬가지다.

승부는 너무도 확연하기에 이제 검토판도 담고 있었는데 누군가 갑자기 소리친다. ‘앗! 저게 뭐야. 이거 역전인데!’ 모두 다시 주의를 바꿔 판을 보니 중앙에서 한차례 파란이 일 조짐이다. 실전도의 흑1로 둔 장면에서 일이 터졌다. 백a로 받아 두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무심코 백2로 끝내기를 한 것이 화근이었다.

흑3으로 밀고 들어가자 백은 더 이상 응수할 수가 없다. 참고도 백1로 이으면 흑2로 끼워 a, b의 양쪽 백 석 점 끊기는 것이 맞보기다. 이 찌르는 수를 방심했던 것이다. 결국 당황한 백은 4, 6으로 변화를 시도했지만 실전 흑7로 끊겨서 a, b 양쪽 맞보기로 한 순간에 허무하게 끝이 나버렸다. 침착하기로 소문난 박승현 6단의 얼굴도 벌겋게 달아오름은 어쩔 수가 없었다. 프로들도 이런 실수를 한다. 이런 실수에 안타깝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 되지만 그것을 자신이 아파하고 반성하고 견디고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한다. 그것이 이 세계를 살아가는 방식이다.

넓은 창공에서 멋진 비행을 하기 위해선 더 많이 실패하고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은 날갯짓을 해야 한다.

<프로 4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