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구마모토현 거주 심재길 할아버지 증언… 日 열도 최북단∼최남단 오가며 혹한·불더위 속 중노동
입력 2010-03-09 21:27
제1부 일본 3대 재벌의 전쟁범죄
③광산업 장악한 최대재벌 미쓰이
심재길(92) 할아버지는 강제노역 피해자 중에서도 이중으로 고초를 겪은 경우다. 느닷없이 일본 최북단 홋카이도로 끌려가 살을 에는 추위에 떨며 3년 넘게 중노동을 하고, 다시 최남단 규슈 지방으로 내몰려 막장을 달구는 불더위에 시달려야 했다. 일제에 의해 이른바 ‘전환 배치’를 당한 것이다. 극과 극의 탄광을 오가며 겪은 고통을 다시 되살리기 싫어 처음엔 인터뷰도 고사했다.
심 할아버지는 기본적으로 유순하고 우직한 성품이다. 그래서 일본인 노무관리자의 악독한 폭력에도 그저 몸으로 감내하면서 강제노역 시절을 묵묵히 삭여냈다. 대개 조선인 노무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광복 이후에도 계속 일본에서 살아 온 심 할아버지를 1월 22일 구마모토현 아라오시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목청을 높이거나 흥분하는 법 한번 없이 순박한 얼굴로 질문에 답했다.
-일본 탄광에는 어떻게 가게 되셨나요.
“고향이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외룡리예요. 어느 날 탄광회사의 일본 사람들이 여주군에 와서 ‘사람 내놔라. 데려가야 한다. 탄광에서 탄을 캐야 폭탄도 만들고 전쟁을 한다’고 했어요. 강제로 내놓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외룡리 구장(지금의 통·이장)이 동네 사람 모이라고 해서 회의를 했습니다. ‘누가 갈래?’ 하는데 아무도 안 가. 탄광 가면 다 죽는다고. ‘그럼 할 수 없다. 형제가 많은 집에서 한 사람 보내야 한다’고 해서 내가 가게 됐어요. 내가 3형제 중 막내라. 나 말고 북내면에서 최영일이라는 사람이 5형제 집안이라 갔고, 박창순이라는 사람도 몇 형제인지는 기억 안 나지만 가게 됐지. 그래서 1941년 5월 8일에 나까지 세 사람이 북내면에서 갔어. 여주군에서는 전부 53명이 갔고.”
-탄광 생활은 어떠셨나요.
“처음에 간 게 홋카이도 구시로 탄전에 있는 하루토리탄광(태평양탄광주식회사 소유)이에요. 회사 사람이 직접 여주로 와서 작업복을 주고는 한 일주일 걸려서 홋카이도까지 인솔해 갔어요. 갔더니 ‘탄 파는데도 미국 사람 아다마(머리) 찍는 것처럼 파라’고 하더라고. 농사짓던 사람이 훈련도 안 받고 바로 굴 안으로 들어가서 석탄을 팠지. 아주 고단해요. 정해진 시간이 없고 할당량이 있어요. 그걸 다 파야 나오지 몇 시간이 지나도 그걸 남겨두고는 못 나와. 새벽 4시면 일 나갔지. 배가 고파 기운이 없어. 그래서 식당에 눌은 밥, 탄 밥 얻어먹으러 다녔어요.”
-고향 북내면에서 같이 갔던 두 분은 어떻게 되셨나요.
“둘 다 죽었어. 박창순은 돌구멍을 파내는 일을 했는데, 일 하고 나오면 흰 소복 입은 것처럼 하얀 돌가루를 뒤집어쓰고 나왔지. 무척 고단하다고 했는데 그렇게 일하다 나중에 피를 토하는 거라. 그땐 뭐 아나. 그런데 탄광 근처 병원에 갔더니 돌가루가 들어가서 폐병에 걸렸다고 얘기해. 병원에 다녔지만 낫지도 않고. 그래서 화장하고 상자에 넣어 근처에 있는 일본 절에 맡겼어. 최영일은 탄광에서 발을 다쳤어. 그러고 나서 전차에 또 발을 치여 결국 죽었지.”
-거기서 미쓰이 미이케탄광으로는 왜 옮기게 되셨나요.
“하루토리탄광에서 탄을 다 파내다 보니까 더 캘 탄이 없어져서 문을 닫았지. 그리고 1944년 9월에 인부 470명을 전부 미이케탄광으로 보냈지.” (당시 일본 정부가 하루토리탄광을 폐광한 실제 이유는 탄질 불량과 수송상의 문제 때문이었다.)
-미이케탄광 생활은 어떠셨어요.
“홋카이도에서는 너무 추웠는데 여기서는 굴에 들어가면 너무 더워. 전부 빨가 벗고 훈도시만 입고 일했어. 일 끝나고 나오면 까만 고양이 같았지. 얼굴이고 뭐고 전부 새까매서. 제일 추운 데서 제일 더운 데로 와서 참…. 그런데 몸이 아파서 한 번은 일을 못 나갔더니 놀면 안 된다, 죽을 때까지 파야 한다면서 도리시마 야코라는 노무감독관하고 또 한 사람이 나를 불러서 막 패. 있는 힘껏 뺨을 때리고. 사람 하나 때려죽여도 죄가 안 된다면서 사무소 안에서 옷을 다 벗기고 두꺼운 ‘베르토(벨트)’로 두 사람이 같이 때려. 하도 피가 많이 나서 신발까지 넘쳐서 흘렀어. 그렇게 우리는 죽을 때까지 파야 하는 거야. 아직도 그때 상처가 남아 있어. 다른 사람들은 사쿠라 나무로 많이 맞았지.”
-광복되고 나서 그 일본인들이 어떻게 하던가요.
“노무관리자들은 다 도망갔어. 나쁜 짓을 많이 했으니까. 조선인들이 지금까지 당한 게 있어서 폭동이나 단체행동을 할 수 있으니까. 나는 그때 나를 때렸던 감독관을 찾아갔어. 만나면 내가 때리려고. 허허. 근데 도망갔더라고.”
심 할아버지는 광복 후에도 미이케탄광이 있던 아라오시에 계속 머물렀다. 한국 사정이 어려울 때라 일본에서 조금 더 살다 돌아가자고 생각한 것이 현지에서 자녀를 낳고 키우며 늦어졌다고 한다. 생계수단이 막막해 고생도 많았다. 그러나 탄광 일은 다시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만 4년이 넘도록 내내 그 일만 한 베테랑 숙련공이었는데도.
“그냥 이런저런 노동 하면서 살았어요. 탄광회사에서 내가 일 잘한다고 자꾸 찾아와서 오라고 그랬는데, 안 간다고 했지. 더 이상 탄광 일은 하기 싫었으니까.”
아라오(구마모토)=특별기획팀 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hk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