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CEO 리더십-(7) 한화그룹 창업주 현암 김종희 회장] 화약산업 개척해 국가재건 초석 다진 ‘다이너마이트 金’
입력 2010-03-08 15:27
1957년 5월 29일 오전 11시 인천화약공장 초화공실을 둘러싼 제방 위에 붉은색의 대형 깃발이 내걸렸다. 초화작업(니트로글리세린을 만드는 과정) 중임을 알리는 표시다. 제방 주변은 물론 공장 전체에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긴장감이 흘렀다.
노벨이 처음 다이너마이트(Nitro-glycerin)를 만드는 과정에서 니트로글리세린 공장이 폭발해 그의 동생이 사망했고 그 후에도 세계 각국에서 크고 작은 니트로글리세린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초화작업이 그만큼 위험하다 보니 초화공실 주위 접근을 막기 위해 작업 시작 전 깃발을 게양했다가 작업이 끝난 뒤 깃발을 내리는 것이다.
그 시각 김종희 한국화약㈜ 사장과 직원들은 시험 초화 성공 여부를 기다리며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국화약의 장래뿐 아니라 작업반원 3명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글리세린 350g을 초화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약 50분. 그 50분간의 작업을 위해 3명의 숙련공은 맹물로만 수십 차례의 모형 실습을 반복하며 호흡을 맞추어 왔다.
초화공실 앞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작업반원을 병원으로 후송하기 위한 트럭까지 대기했다. 50분이 한참 지나 오후 1시30분이 되도록 깃발은 내려가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뛰쳐나간 신현기 제조과장은 그 순간 깃발이 내려가고 “우리가 해냈다”는 외침을 들었다. 니트로글리세린 시험생산에 성공,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다이너마이트를 생산하는 국가가 되는 순간이었다.
며칠 후 각 신문에는 ‘다이너마이트 국산화 개가’ 등의 제목으로 한국화약이 오랜 각고의 연구 끝에 니트로글리세린 제조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김 사장과 초화 작업반 3명을 ‘노벨의 후예들’이라고 소개했다.
58년 6월에는 국산 다이너마이트를 상업생산하기 시작해 전국 수요처에 공급했다. 화약 국산화로 귀중한 외화를 아낄 수 있었고,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국가기간산업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한국화약은 이후 산업용 화약과 방위산업, 기계항공산업을 축으로 국제적 경쟁력을 확보했다.
다이너마이트 개발은 “국가경제 부흥을 위해 화약계를 지키는 등대수가 되겠다”던 한화그룹의 창업주 고(故) 현암 김종희 회장의 확고한 신념에 따라 이뤄진 것이다. 김 회장은 다이너마이트 생산을 위해 10만∼23만환의 엄청난 급료를 주면서 기술자 3명을 데려왔다. 당시는 인천공장장 월급이 3만환, 사장 월급이 5만환이던 때였다.
김 회장이 화약과 인연을 맺은 것은 41년 12월 원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화약공판에 입사하면서부터. 조선화약공판은 일제 치하에서 한국 내 화약류 판매를 전담하던 회사로 광복 후 미 군정청에 귀속됐다. 김 회장은 이곳의 지배인을 맡아 미 군정청 등을 상대로 판로를 개척하고 전쟁 후 한국경제 회복을 위해 화약 가격을 광복 전 수준으로 유지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펴면서 미군 장교들 사이에 ‘다이너마이트 김’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 당시 엿이 한 가락에 50전 했는데 엿가락보다 굵은 화약을 엿가락보다 싼 30전에 산업현장에 공급했다.
그는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는 화약고에 비축된 다이너마이트 3000상자를 지키기 위해 피란을 가지 않았을 정도로 화약산업에 대한 애착이 컸다. 한국전쟁 후 까다로운 화약 대신 염료나 도료 등 이익이 많이 남는 화공품을 들여오자는 주변 건의에 김 회장의 대답은 단호했다.
“몇십 배가 남는다고 해도 난 설탕이나 페인트를 들여올 달러가 있으면 단 얼마라도 화약을 더 들여올 겁니다. 나는 솔잎을 먹고살아야 하는 송충이요. 화약쟁이가 어떻게 설탕을 들여와요? 난 갈잎이 아무리 맛있어도 솔잎이나 먹고 살거요.”
64년 경영난으로 부도위기에 놓인 신한베아링공업을 인수한 것은 김 회장의 ‘사업보국(事業報國·사업으로 국가에 보답한다)’ 창업 이념을 보여준다. 국가와 미래를 위해 반드시 일으켜 세워야 할 기계 공업을 맡을 사람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김 회장은 “적어도 10년은 적자를 감수하고 투자를 계속해야 한다”는 임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화약산업과 전혀 무관한 신한베아링공업을 인수했다. 65년엔 석유화학 시대가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한국화성공업을 설립하고 68년 진해에 연산 1만5000t 규모의 PVC 공장 및 PVC 가공 공장을 세웠다. PVC 제품은 국내 건축재료, 피혁, 철강재 및 각종 일용생산 분야에 중요한 원료로 공급됐고 특히 비닐하우스 공급으로 농업 증산에 크게 기여했다.
큰돈을 벌 수 있다고 해도 소비재 시장은 쳐다보지도 않고 국가기간산업 중심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던 김 회장이 73년 식품업에 진출한 계기는 특이했다. 당시 김보현 농림부 장관으로부터 젖소 사육 농가를 돕기 위해 부도 난 대일유업을 인수해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국민 생활형편이 넉넉지 못해 ‘우유 먹기 캠페인’도 별 효과가 없어 젖소가 생산한 우유가 버려지고 있으니 대일유업이 지으려던 아이스크림 공장만 인수하면 젖소 4000마리에서 생산하는 생우유를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주식 50%를 인수하고 대일유업의 아이스크림 공장 건설을 떠맡았고, 퍼모스트사와의 기술제휴 기간이 끝난 76년 6월 ‘빙그레’란 상표로 아이스크림을 출시해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화약을 비롯해 석유화학, 에너지, 무역, 기계, 금융, 건설, 식품, 전자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히며 성장가도를 달리던 한화그룹은 77년 11월 이리역(현재의 익산역) 폭발 사고로 창업 이래 최대 시련을 맞게 된다. 한국화약그룹은 이제 끝났다는 게 당시 분위기였다. 보상액 규모도 어마어마했을 뿐만 아니라 사고 자체가 워낙 크다 보니 그간 공들여 쌓은 이미지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처지였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사고 원인이 밝혀지기도 전에 사고 다음날 각 중앙지 석간신문에 무조건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정부가 책정한 재해복구비 50억원의 배가량인 자신의 전 재산에 해당하는 90억원을 피해보상금으로 내놓기로 했다. 원인이야 어찌됐든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다시 맨손으로 돌아가 떳떳하게 새 출발하겠다는 김 회장의 의지는 각계각층에 한화그룹 이미지를 새롭게 각인시켰다.
81년 7월 김 회장 타계 후 바통을 이어받은 장남 김승연 회장은 한양화학 인수, 경인에너지의 외국 지분 인수 등으로 석유화학 부문을 강화했다. 또 정아그룹과 한양유통 등을 인수하며 유통과 서비스분야로 사업영역을 넓혔다. 92년에는 한국화약그룹에서 한화그룹으로 이름을 바꿨다. 81년 5000억원 수준이던 한화그룹 자산은 지난해 말 현재 86조원으로 늘었고, 45개 계열사에 매출 33조원을 올리는 세계 일류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명희 기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