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수의 영혼의약국(47)

입력 2010-03-08 15:49

996.3 m의 성서사본

오늘날 '책(冊)'이라고 하는 말은, 대 조각(竹簡)에 글씨를 써서 노끈으로 엮으면 '冊'자의 형상이 나온다. 이걸 보고 '책'이라 했던 것이다. 이것을 '죽서(竹書)'라고 했는데, 죽서를 거두어 말아 적당한 대통(竹筒)속에 넣어 보관했으므로 그것을 일러 권(卷)이라 했다. 간편하게 말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도 책을 헤아릴 때 '한 권' '두 권' 하는 것이다. 담배도 그렇게 둥글게 말려 있다고 해서 옛날에는 '권련(眷戀)'이라 했다.

지난 한 해 동안 교우들이 쉬엄쉬엄 성경 66卷을 모두 한지에 옮겨 썼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두루마리가 설교단 위에 산처럼 쌓였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며칠 전, 여남은(열 명이 넘기도 하고 모자라기도 한 숫자) 명의 교우들이 모여들어 성서 사본에 풀칠을 하기 시작했다. 예쁜 도배지에 필사된 한지를 붙이고 다림질을 했다. 그러기를 엿새 동안, 연인원 90여명이, 996.3m(12.3m×81)의 장대한 성서 두루마리를 완성했다. 아침부터 밤늦게 까지 온 몸으로 말씀을 돋우고 새긴 교우들은 두 말할 것도 없고, 장장 1km나 되는 길을 풀 묻혀 왕복으로 달린 이들과, 그들을 위해 음식을 해 나르고 간식을 준비한 손길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오늘 저녁, 손바닥에 말라붙은 풀이나 떼자고 감자탕 집에 모였다. 자축하는 자리에서 교우들은, 풀칠하는 엿새가 10년의 사귐보다 진하고 보람되었단다. 도배지 값 25만원이 지출의 전부지만, 일용 노동자의 품삯으로만 쳐도 1000만 원은 족히 될 산술적인 가치에 대해서도 기뻐했다. 그러나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지, 그게 성서를 필사하고 제본한 교우들이 누리는 기쁨의 전부 또는 실체는 아니다. 설교단이 있는 예배당 맨 앞에 걸린 십자가 밑에 66개로 나누어진 방에 들어가 있다가, 매 주일 아침마다 펼쳐져 읽힐 그 '내일 과 내일'의 감격이 더 설레는 것이다.

자작나무처럼 서 있는 66개의 저 두루마리들은 얼마나 장엄한가? 마치 교우 한 사람 한 사람이 직립하여 하늘을 우러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하나님의 사람들로 엮여(冊)진 살아 있는 '책'처럼 보이지 않는가?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 살아 있는 말씀의 책이 된 나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춘천 성암감리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