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한 아내…여생도 동행할 것” 세계 여성의 날 남편들의 아름다운 세족식

입력 2010-03-07 22:03


휠체어에 앉아 바짓단을 걷어 올린 김은자(가명·51·여)씨의 종아리는 가늘었다. 10대 소년의 팔뚝 같았다. 양말과 버선, 신발을 벗자 손바닥만한 맨발이 드러났다. 발가락은 사방으로 굽어 있었다. 일부는 퇴화하듯 오그라들었다. 29년 전 발병한 류머티즘성 관절염이 김씨의 뼈마디를 침식한 탓이었다.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은 남편 정성구(가명·56)씨가 나무 대야에 담긴 물로 김씨의 발을 씻겼다. 말없는 정씨는 내내 글썽였다. 그가 고개를 들지 않은 탓에 김씨는 남편이 우는 줄 몰랐다.

“아내가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눈물밖에 안 나와요. 결혼 전 이미 류머티즘성 관절염에 걸려 누워 있던 아내에게 청혼하면서 ‘내가 당신을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했어요.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겁니다.” 김씨의 발에서 물기를 닦아낸 정씨는 돌아서서 말했다. 그는 끝까지 아내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7일 오후 12시30분쯤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 세계 여성의 날(8일)을 하루 앞두고 ‘여성 류머티즘 환자를 위한 세족식’이 열렸다. 가족이 환자의 발을 씻기며 여생도 동행하겠노라 다짐하는 자리였다.

류머티즘성 관절염은 염증이 뼈마디를 파고드는 질환이다. 재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관절은 기형적으로 뒤틀린 채 굳어버린다. 환자들은 “벌레가 뼛속을 기는 듯하다”거나 “사지를 송곳으로 쑤시는 듯하다”며 고통을 표현한다. 발병 원인을 모르고 치료법도 없다. 환자의 70∼80%가 여성이다.

세족식을 주관한 ‘대한류마티스학회’는 2008년부터 매년 봄 류머티즘성 관절염의 심각성을 알리는 행사를 벌이고 있다. 사회적 관심과 지원을 이끌어내자는 취지라고 학회 이수곤 이사장은 설명했다. 세족식에 참가한 환자와 가족 22명은 지난 5∼6일 제주도 올레길 일부 구간을 완보하고 이날 상경했다.

이들은 세족식을 마치고 정동길을 걸었다.

서울광장 건너편 대한문을 출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미근동 경찰청까지 이어졌다. 5㎞ 거리지만 발목과 무릎이 뻣뻣하게 굳은 류머티즘성 관절염 환자에게는 짧지 않다. 다만 평탄하고 풍치가 좋아 제주 올레길과 함께 류머티즘성 관절염 환자에게 적합한 길로 꼽힌다.

573회 헌혈로 한국 기네스 기록을 보유한 손홍식(60)씨도 아내와 함께 이 길을 걸었다. 아내 박수자(58)씨는 류머티즘성 관절염으로 20년째 투병 중이다. 손씨는 “장기를 남들에게 떼어줄 정도로 봉사활동에 열심이었지만 정작 가정에 소홀했다”며 “아내를 위한 첫 봉사로 행사에 참가했다”고 말했다.

환자들은 다른 환자를 만나 동병상련하며 무거운 마음을 덜었다고 털어놨다.

지난해 10월 열린 전국장애인체전에서 복식 탁구로 은메달을 딴 김영희(50·여)씨는 “그동안 나 혼자만 아픈 줄 알았는데 다른 환자들과 길을 걸으며 투병의 고통을 나누면서 마음이 편해졌다”면서 “정상인이라도 류머티즘 증상이 나타나면 조기에 진단받고 치료받아 우리 같은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