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비디오 아트 대부 박현기 10주기 회고전
입력 2010-03-07 17:47
비디오 아티스트 박현기(1942∼2000)를 아십니까.
백남준(1932∼2006)이 ‘세계적인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라면 박현기는 ‘한국적인 비디오 아트의 대부’다.
1960년대 홍익대에서 회화와 건축을 공부한 박현기는 74년 당시 미국에서 활동한 백남준의 작품을 통해 비디오에 관심을 갖고 입문했다.
하지만 그가 펼쳐낸 비디오 아트의 세계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의 비디오 아트는 텔레비전과 테크놀로지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서구의 비디오 아트와 같은 맥락이지만 태동 시기와 자라난 문화적, 경제적 환경이 다르고 형식과 내용에서도 전혀 다르게 구현됐다. 서구의 비디오 아트가 기술적인 측면에 치중했다면 박현기는 비디오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동양적 정신문화를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해석했다.
작가는 70년대 한국현대미술이 추구했던 가치의 계보를 이어가는 작업을 펼쳐냈다. 돌 위에 TV 모니터를 얹은 그의 대표작 ‘비디오 돌탑’(1978)을 보자. TV에 보이는 가상의 돌들이 진짜 탑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 영상과 실재가 교묘하게 어우러지며 일체를 이루는 작업이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호평을 얻어 80년 파리비엔날레에 참가하는 기회를 얻었다.
“돌이란 태고의 시간과 공간을 포용하는 자연이다. 돌 작업은 자신을 표현하고 서구과학의 한계를 느낀 우리 입장과 나를 확인하는 과정”(작가노트 중에서)이라며 돌의 의미를 동양적으로 해석한 그는 TV 모니터 외관이 마치 어항같고 TV속 물고기가 어항속에서 유영하는 것처럼 보이는 ‘TV어항’(1979) 등으로 ‘비디오로 그리는 동양화’라는 평을 얻었다.
다양한 실험을 통한 혁신적인 작품을 선보인 그는 개념미술의 시도와 함께 서구 미니멀리즘에 동양적 사유세계를 접목시킨 독특한 미학을 소개했다. 그러나 미술사적 업적에 비해 그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58세의 나이로 숨져 아쉬움을 남겼다. 그의 10주기를 맞아 작품세계를 재조명하는 회고전이 9일부터 28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린다.
79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선보였던 ‘물기울기’ 퍼포먼스 사진을 비롯해 낙동강 물의 흐름을 촬영하거나 돌 줍는 과정을 찍은 ‘무제(1981), 텔레비전과 시소를 연결시킨 ‘TV 시소’(1984), 장방형의 돌침목을 갈고리처럼 잘라 벌린 뒤 그 사이에 돌을 끼워넣고 모니터를 부착시킨 ‘나무손’ 시리즈 등 20여점이 공개된다.
그가 숨지기 전 작업한 ‘폭포’(1997)는 스크린 보드 위에 쏟아져 내리는 물의 이미지를 비춘 작품으로 작가는 삶과 예술에 대한 심경을 ‘물심’(物心)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物-心, 물질에 걸려있는 내 마음처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내 마음처럼 변하지 않는 물질도 없구나. 결국 자신 외에 아무도 변한 것 없네.”
강태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박현기는 흔히 한국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미미하고, 자신만의 언어를 개발한 작가였지만 학문적 연구의 대상에서 배제돼 왔다”면서 “백남준 작품과는 차별화된, 그가 돌·물·나무 등을 소재로 척박한 땅에 쌓아올린 비디오 탑은 굳건하고 드높아 보인다”고 평했다(02-2287-3500).
이광형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