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뿐인 삶, 그래도 살아야 한다… 한강 네번째 장편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

입력 2010-03-05 17:55


“우리는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것, 진실과 거짓, 현재와 기억, 성스러운 것과 인간의 하찮은 몸부림 그 사이의 간극이 어떠하더라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예민한 감수성으로 세상의 폭력성을 날카롭게 통찰해왔던 작가 한강(40)이 네 번째 장편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문학과지성사)를 펴냈다.

전작인 ‘채식주의자’에서 폭력적인 세계와 그를 감당해야 하는 삶의 고통을 응시했다면, 이번 작품은 한 발 나아가 그래도 살아야 함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작가는 설명했다. 존재의 고통과 상처받는 영혼의 아픔을 세심한 결로 읽어내 온 작가의 목소리는 여리고 부드러웠다.

소설은 그 누구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우주와 진실과 사람의 문제에 대해 시공간과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유한다. 우주, 별, 먹, 피 등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인 이 오묘한 단어들의 조합은 ‘바람이’의 세계 안에서 생과 진실에 대한 문학적인 논리를 구축해간다.

소설은 촉망받는 여자 화가 서인주의 죽음을 둘러싸고, 친구인 이정희와 평론가 강석원이 진실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긴장감 있는 문체로 펼쳐지는 밀도 높은 탐색의 서사 속에서 사람들은 격렬하게 싸우고, 상처 입는다. 과거의 내밀한 상흔도 파헤쳐진다.

화자인 정희와 인주는 단짝 친구다. 정희는 고교시절 화가인 인주의 삼촌을 사랑하지만 삼촌은 곧 죽는다. 육상을 하던 인주는 다리를 다친 후,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 사이 인주는 결혼해 민서라는 아들을 낳았지만 남편과 이혼하고, 정희 역시 삼촌과 닮은 남자인 K와 결혼해 세 번의 유산을 경험한 뒤 이혼한다. 한동안 정희와 인주, 민서는 함께 살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인주는 미시령 고개에서 자동차 사고를 당해 죽는다. 인주가 죽은 후 평론가 강석원은 인주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하고, 인주에 관한 책을 집필한다.

소설은 이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인주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고 믿는 정희와 자살이라고 주장하는 강석원, 두 사람은 각자의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인주의 생전 행적을 탐문해나간다.

“인주에게는 스스로 죽을 이유가 없었어요. 그 애는 삶을 사랑했어요.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 정말 그랬어요”(32쪽)

정희는 생전의 인주와 친하게 지냈던 사람, 인주의 그림을 전시했던 화랑 등을 탐문하는 동안 자신이 인주에 대해 무지했음을 깨닫게 된다. 강석원의 물리적 폭압에도, 파헤칠수록 자신에게 얹어지는 인주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정희는 끝까지 진실을 찾으려고 한다. 그건 인주의 아들 민서에게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서로 의지했고 사랑했던 사람들 사이의 권리이자 의무다. 진실이 무엇인지,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영원히 알 수 없더라도, 그것을 알아가려는 노력 자체가 생을 생답게 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작품 후반 정희는 인주 어머니의 삶을 통해 좀 더 구체적인 진실에 다가가지만, 인주에 대한 애증으로 가득 찬 강석원의 테러로 생사의 고비를 맞게 된다. “살고 싶다.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마다 가슴과 배가 벌레처럼 필사적으로 꿈틀거렸다. 한 뼘, 또 한 뼘. 살고 싶다. 살고 싶다.”(-정희의 독백, 381쪽)

“그러니까, 생명이 우리한테 있었던 게 예외적인 일, 드문 기적이었던 거지. 그 기적에 나는 때로 칼집을 낸 거지. 하지만 알 것 같아.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는 걸. …지금 내가, 그 얼음 덮인 산을 피하지 않으려는 것처럼.”(-인주의 독백, 386쪽)

정희는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인공호흡기를 쓰고도 숨을 토해낼 정도로 삶을 열망하게 된다. 한강은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5년 전, 의식불명의 환자가 인공호흡기를 쓰고 있다가 갑자기 스스로 숨을 쉬면서 벌어지는 충돌을 일컫는 말인 ‘breath fighting’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생에 대한 열망이죠. 인주가 얼음 덮인 산을 찾아가는 것 역시, 과거와의 조우를 통한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아니었을까요.” 섬세한 작가의 목소리가 소설의 잔향과 함께 유난히 호소력 짙게 다가왔다.

양지선 기자 dybsun@kmib.co.kr